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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오랑 Jul 04. 2023

#시가 있는 여름(122) 꿈꾸는 허수아비

꿈꾸는 허수아비

                             재환     

실업자가 되어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하고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다고 세상을 등진 건 아니다

공장을 베트남으로 옮긴 이 사장과

추수를 끝낸 농사꾼 이 씨에게는

용도폐기가 됐을지 몰라도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야 하는 나와

산고를 겪고 있는 어느 시인에게는

아직 푸른 영감을 줘야 하는 일이 남았다

쇠파리가 눈앞에서 희롱하고  

볏짚 모자 쓰고 지나가던 나그네조차 시비를 걸지만

인상 한번 찌푸리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은

그 시인의 시구 하나에 나의 운명이 정해짐을 알기 때문이다

난 곧 쓰러질 것이라는 내 운명을 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결국 지푸라기인 내가 더 잘 안다

들불이 되리라, 그것의 불소시개가 되리라

텅 빈 겨울 들판에서 얼마나 손발이 시려야

바코드가 찍힌 신분증을 받을 수 있을까

화려한 스펙 대신, 나는 앙상한 뼈만 남기고

오래도록 당신을 기다리며 서 있다

지나가는 길에 막걸리나 한 사발 뿌려다오

그럼 나도 그 취기로 주연을 꿈꿀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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