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장의 인심도 좋아요
지도는 낯선 곳을 찾을 때 길라잡이가 되어 준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나설 때 가져갔을 법한 것도 얼기설기 그려졌을 지도요. 6.25 전쟁 때 국군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품속에 지니고 떠났을 것도 지도였을 터이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자동적으로 귀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 지도인데 요즘은 그것을 그림 대신 음성이 가미된 내비게이션이라는 기계가 대신하기도 한다니 격세지감이다.
내게도 나만의 지도 한 장이 있다. 건강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안방 들락거리듯 하고부터 생긴 것이다. 내 지도는 등고선이 조밀하게 그려진 그런 지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인공위성 사진이 칼라로 그려진 입체지도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흰 도화지에 주요 도로와 거리, 차로 걸리는 시간이 표기된, 그야말로 초보자가 그린 그림 수준이다.
하지만 나는 이 지도만 들면 자신감이 충만해지고, 눈에 생기가 돈다. 내게는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목숨 줄과도 같은, 더구나 맛이 있기까지 한 음식을 판매하는 맛집 지도이기 때문이다.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소위 맛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친구끼리 연인끼리, 때로는 가족들끼리 맛집을 찾아다니며 주말이나 연휴를 보내는가 하면 소위 맛집으로 소문난 집 앞에는 평일에도 장사진을 이룬다. 그런 맛집들 중에는 소문대로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음식을 대접받기도 하지만 어느 곳은 말만 거창할 뿐 실상은 허당인 경우가 있다. 아무튼 요즘은 과연 맛집 열풍이라 할 만하다.
나도 10여 년 전만 해도 맛집 마니아 중 한 사람이었다. 본격 맛집 열풍이 불기 전부터 맛집을 찾아다녔으니 이런 점에서는 나는 선구자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점심시간이면 맛있다고 소문난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는 것이 직장 생활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다. 특히 난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일찍 월급쟁이에서 벗어나 사업체를 운영하게 행운을 갖게 됐고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는 여느 다른 직장인들보다 빨랐다.
친구들이나 부하직원들이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는 호주머니 속에 항상 넣어다는 던 수첩이었다. 이 수첩에는 내가 사는 지역 일대의 맛집의 리스트와 음식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 철 따라 어느 집에 가면 제철음식이 나오는지, 같은 식재료라도 어느 집 주방 아주머니의 솜씨가 좋은지, 심지어 어느 집 아저씨가 직접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지( 내 고향은 포항이다)도 표시돼 있다. 그러니 나의 맛집 안테나를 벗어난 맛집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런 맛집 지도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지인들의 손님 접대에도 유용하게 사용되곤 했다. 그래서 내 휴대전화기는 점심시간을 두어 시간 앞둔 시간부터 부지런히 울리기 시작한다. 십중팔구는 “이맘때쯤은 어느 식당이 좋아”라고 묻는 전화다. 이 보배와 같은 수첩을 3년여 전쯤 친한 친구에게 넘겨줬다. 내게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물건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3년 전 말기신부전 판정을 받고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 1주일에 3번씩, 1번에 4시간씩 인공 신장기에 의존해 혈액 속 찌꺼기를 걸러내며 생명을 연장받고 있다. 한마디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한 표현 일 것이다.
혈액투석환자에게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바로 식이조절이다. 투석 때마다 환자와 주치의가 신경전을 벌이는 일도 바로 식이요법과 체중 증가 문제다. 건 체중을 정해 놓고 그 목표 체중을 넘어서면 사정없이 빼 버린다. 몸속 수분과 독소를 빼내지 않으면 가슴에 물이 차게 되고 숨이 차오며 결국에는 호흡곤란과 혼수,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비교적 멀쩡하던 환자가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오거나 사망에 이르는 데는 대부분은 바로 이 식이조절 실패에서 온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혈액투석을 받기 시작한 지 2년여쯤이 되자 투석 자체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음식 조절이었다. 맵고 짠 음식은 절대 삼가해야 하는 규정상 나 자신도 문제였지만 역시 고통스러운 것은 가족들이었다. 같은 재료로 만든 반찬이라도 하나는 맵고 짜지 않은 것으로, 또 하나는 보통의 간으로, 2가지 반찬을 해야 했다. 더구나 수분 섭취를 제한해야 했기에 국이나 찌개는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만들지 않아 가족들이 이런 것들을 맛보는 날은 생일날 등 아주 특별한 날 뿐이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바로 나만의 ‘맛집 지도’다.
나의 맛집 지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단연 두부음식 전문점 들이다. 대부분 국산 콩으로 직접 두부를 만드는 집이다. 게 중에는 매일, 적어도 3일에 한 번씩은 직접 두부를 만든다. 나이가 지극하신 할머니가 만드는 집이 대부분이지만 어느 집은 시어머니의 감독하에 며느리가 만드는 집도 있다. 물론 시어머니가 안 계신 젊은 아주머니는 그 옛날 친정어머니가 만들든 것을 어깨너머로 배운 경우다. 이런 손두부 집에 들르면 순두부는 물론 비지찌개, 두부전, 모두부, 두부전골 등 입맛대로 골라 먹느라 본의 아니게 조금 과식하게 된다.
또 연밥을 전문으로 하는 한정식 전문집도 있다. 일종의 사찰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집인데 요즘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업 중이다.
나의 맛집 중에서 가장 크게, 중요 표시가 된 곳은 역시 우뭇가사리와 골(게) 복지 등 해산물을 주 메뉴로 하는 할머니 집이다. 00할 매집도 아니고 그냥 할머니 집이다. 수십 년간 그렇게 통했고 지금도 통한다.
할머니 집에 들어서면 알아서 할머니가 음식을 내놓는다. 인사라고는 서로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씩 웃는 것이 전부다. 해초로 만들어진 음식들도 칼륨이 많아 생으로 먹으면 안 되지만 삶거나 끓여서 굳힌 것은 그래도 상관이 없다. 대표적인 음식이 우뭇가사리를 삶아 굳힌 우뭇가사리 묵이다. 멸치 다시마 육수 물에 우뭇가사리 묵을 채 설어 올챙이국수처럼 만든 우뭇가사리 국수는 간장 양념으로 간을 해 먹으면 한 그릇쯤은 뚝딱 비워도 된다.
개(골) 복치도 생선의 뱃살 부위인데 흰 뱃살 부위를 삶아 굳히면 도토리를 많이 넣어 만든 묵처럼 탱글탱글하면서도 반투명의 묵이 된다. 나무젓가락으로 탱글탱글한 개복치를 초장을 찍어 먹으면 그야말로 씹을 것도 없이 술술 넘어간다.
그 밖에도 현미나 잡곡밥을 먹지 못하게 하는 이유로 좋은 쌀로 흰쌀밥을 잘 짓는 집, 좋은 육질의 소고기 구이를 잘하는 집, 동물복지로 키운 닭이 나은 계란을 내놓는 집, 철 따라 나는 버섯을 주 메뉴로 하는 버섯 전문집 등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간혹 아프기 전에 가지고 다닌 던, 친구에게 넘긴 작은 수첩이 그리울 때가 있다. 더구나 친구가 술에 취해 옛날이야기를 하며 “빨리 나아라, 수첩을 빨리 돌려주고 싶다”는 말을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건강이 회복되면 그 수첩 속 맛집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훑어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져 보기도 한다.
그런 날이 이제 1,2년 정도면 찾아올 것도 같다. 뇌사자 장기기증 신청을 해 놓은 지가 5년여 째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혈액투석을 받는 말기신부전 환자 수가 10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 모두는 투석치료를 받으며 연명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신장 공여자가 나타나 이식 수술을 받을 때까지 매일 음식과의 전쟁을 치르며 살고 있다. 나 또한 매끼 음식과의 전쟁을 치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장기기증자와 그 가족의 숭고한 뜻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는 돼 있는가? 그런 겸허한 삶을 살고 있는가? 수없이 묻고 또 묻는다.
나의 맛집 지도가 긴 고통의 세월을 나와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