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불안이 나를 찾아올 때에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새벽 다섯 시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당시 백수로 고향에 돌아와 다 무너져 가는 시골집에서 숨죽이고 살 때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의지할 것은 책과 카메라뿐이었다. 당시 렌즈가 8개 정도 있었는데, 백수가 되면서 비싼 순서로 네 개를 처분했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새끼들을 보내었다. 그래도 시그마에서 낸 A시리즈 35mm f1.4 렌즈는 겨우 남겨 두었다. 항상 이 녀석이 장착되어 있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그다음 나도 모르게 삼각대에 결착시켜 버렸다.
어쩌겠는가. 산책 나가자고 졸라대는 강아지처럼 카메라가 졸라대니 나갈 수밖에. 핑곗거리를 찾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내 의지를 믿을 수 없던 것이었을까. 그 모든 의심을 머리에 담은 채 깊은 밤, 시골길을 향해 걸었다.
인간은 불안한 존재라고 수 백 번 이야기했다. 나의 글 “불안에 대하여”에서 조금 자세히 다루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안을 동력 삼아 삶을 살아보겠다는 한 실존의 발버둥이었을 뿐이었다. ‘인간은 불안하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인간으로서 살아내야 하는 삶 역시 불안하다. 나는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바다로 뛰쳐나갔고, 마치 동물들의 흔적 남기기 마냥 내 고민들을 마구 던져 놓고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불안이 해소가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때가 오늘이었나 보다. 나의 발자국 소리와 거친 숨소리, 벌레소리가 합쳐져 도저히 아름답지 않은 불협화음이 만들어졌다. 찬송가라도 불러야 하나 싶었지만, 아쉽게도 무서움을 전혀 타지 않아 무서워야 할 기회도 뺏겨 버렸다.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모르는 길은 아니지만, 걸어서는 가본 적 없는 곳. 낯섦이 주는 묘한 긴장감은 생각보다 처진 의식을 깨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삼각대의 발을 길게 빼 지팡이 삼아 하염없이 걸었다. 이곳에서 찍고, 저곳에서 찍다 보니 카메라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마음은 꽤나 가벼워졌다. 콧노래도 나오는 걸 보면, 기분을 전환시키는 데에는 걷기보다 좋은 게 없다. 자세를 낮춰서 아니면 고개를 들면서 걷는 새벽 시골길의 적막함은 온전히 나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무거워진 카메라, 가벼워진 발걸음.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역사가 지금 내 안에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이유 없는 불안이, 아니 이유는 있지만 없다고 믿고 싶은 이 불안이 어느덧 밀려나고 사라져 있었다.
새벽 동이 트려나, 저 멀리 푸르스름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변 대부분의 길들은 내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동이 트니 이제 내 차례이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나 즐거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