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해

빛 내림

by 이뉴

제주에 있었을 때였다. 공돌이가 되기 훨씬 전부터, 제주를 다녔다. 반은 일, 반은 여행이었다. 여행 중 별별 요상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비 오는 날 오토바이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까지 끌고 간 기억. 바람이 세게 불 때, 해변 도로를 지나다가 파도에 맞은 기억. 드론 날리다가 “NO Signal" 표시 뜨고 뒷목을 잡았던 기억. 마라도에서 기상악화 되기 직전에 빠져나온 기억. 다크 투어를 통해 슬픔을 나누었던 기억. 작은 포구 월령에서 죽겠다고 땡깡 부린 기억. 좀비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다랑쉬오름에서의 아찔한 기억. 1km가량 펼쳐진 바다 한가운데 길을 걸어본 기억. 일일이 전부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제주에서의 모든 순간은 소중했고, 아름다웠다. 이 모든 기억들보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우연히 지나다가 만난 빛 내림의 순간이었다. 정말 우연이었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만난 아름다운 빛 내림 현상에 마음을 뺏겼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몇 번 마주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가 카메라를 들고 그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지고 있던 모든 카메라를 활용하여 미친 듯이 찍은 것이다. 그 후로 빛 내림의 현상만 보이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20191115-_MG_9062.JPG 동해 바다였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출퇴근 길, 운전 중에 겹겹이 쌓인 구름 사이로 빛이 내려오는 걸 발견하면 즉시 안전한 곳에 차를 세운다. 시골 사는 게 이래서 좋다. 하나도 좋을 게 없는 출퇴근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아름다운 광경이 있기 때문이다. 셈을 해보진 않았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은 꼭 볼 수 있었다. 신이 강림한다거나 천사가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다소 흔하지만, 그럼에도 멋있는 이 현상은 언제나 나를 기쁘게 했다. 항상 보조석에 카메라가 있는 이유도 이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160827-1.jpg 서해 바다 빛 내림

무엇보다도, 그림 같은 풍경에 넋을 놓고 보고 있노라면, 잠시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뿜은 한 모금 한 모금에서 삶이 묻어 나오는 것처럼, 빛이 내려오는 그 짧은 순간을 향해 넋두리하고 있는 나의 한숨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한 모금의 숨마저 오랜 시간 내뱉을 순 없다. 나는 금방 자리를 털고 회사로,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삶은 절대로 녹록지 않다. 회사와 가정, 그 외 여러 가지 네트워크로 얽혀 사는 우리의 삶은 금방 지치기 마련이다. 쓰레기 처리가 이 시대의 화두가 된 것처럼 마음속에 쌓여 가는 쓰레기도 잘 처리해야 한다. 처리에 대해 사람마다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이렇게 풍경을 보며 입을 벌리고 ‘멍’하게 쳐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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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그랜드캐니언 빛내림




이 순간도 금방 사라진다. 나도 이제 다시 어디론가 가야 한다. 빛이 내리는 방향이던지, 아니면 빛이 닿지 않는 방향이던지. 시동을 걸고, 어깨 한 번 털어주고, 기지개를 켠 다음, 다시 힘듦을 짊어지러 달려가야 한다. 금방 사라지는 묘한 존재들이 만나는 그 지점엔 이제 누군가가 받고 돌아간 작은 위로만이 놓여 있었다.


20191106-_MG_9060.JPG AM 06:00 출근길 시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