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는 짜릿해...
오늘 날짜로 15일 차 순례길이 진행 중이다. 바야흐로 엊그제 무려 43km나 걷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잘 아시겠지만 11월부터는 순례길 위의 알베르게가 많이 닫는다. 그래서 늘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부르고스 입성하기 며칠 전날부터 예약을 했다. 지금 생각보다 많은 인원들이 순례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조금은 조용한 동네에서 지내고 싶어 작은 마을들 위주로 찾아봤다.
큰맘 먹고 부르고스에서 온타나스까지로 여정을 잡았다. 30km가 넘는 꽤나 긴 구간이기 때문에 첫 번째 까미노인 나는 살짝 부담되는 거리이다. 기껏해야 산솔갈 때 빼고 30km를 넘긴 적이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산솔까지는 30km 살짝 넘었을 뿐이다.) 메세타 평원의 초입을 나름 재미있게 걸었다. 30km 넘자마자 힘이 들기 시작했다. 하필 라면도 여섯 봉지에 과일도 여섯 개를 짊어지고 가는터라 그 약간의 무게조차 천근만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아름다운 마을 온타나스에 도착했다. 얼른 알베르게부터 찾아서 갔다. 문이 닫혀 있었다. 오후 1시가 살짝 안 된 시간이기 때문에 기다려보기로 했다. 기다려도 안 열렸다. 낭패다. 마침 주민분이 지나가시길래 손짓발짓을 다해 전화 좀 해달라고 했다. 몇 번의 통화 끝에 결국 받지 않았다. 주민께 감사하다고 인사만 꾸벅하고 멍하니 있었다. 망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은데 말이다. 분명 연다고 했었는데 말이다. 단톡방에 도움을 구했고 이러저러한 정보들을 주셨다. 오후 3시에 연다는 말도 있었다. 그렇다고 거기서 3시까지 기다릴 도박은 할 이유는 없었다. 일단 다음 마을로 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40여분을 낭비하고 10km 좀 안 되는 다음 마을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 걸었다. 이게 맞는 표현이다. 예약은 눈에 보이는 데로 아무 곳이나 예약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메일, 문자, 전화까지 되도 않는 영어로 확답을 받았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고. 최대한 빨리 갔다. 생각해 보니 아침도, 점심도 못 먹었다. 보통은 체크인하고 밥을 먹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생각조차 못했다.
캐스트로해리스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 앞에 샘터가 있길래 일단 베고파서 물배라도 채우고 체크인을 했다. 부끄럽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급한 사정을 알았던 사장님이 엄청 친절하게 기다려 주셨다. 1시간 10여 분 만에 여기까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왔으니 모든 긴장이 풀려 신발장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침대를 배정받고, 씻고 빨래 돌린 뒤 알베르게를 돌아보니 한식 주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오가며 만난 많은 한국인들이 다 여기에 있었다! 오후 4시 30분, 신라면에 밥 한 공기 시원하게 말아먹고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숨을 골랐다. 저녁때 몰랐는데 엄청 많은 사람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나의 이야기도 하고 독일 아저씨의 빈찬 투정도 듣고 순례길에서 만난 대학교 후배의 이야기도 듣고... 아무튼 계획 없이 온 것 치고는 너무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솔직히 인생에서 계획한 것은 잘 안 이루어진 게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억울하지만 변수로 가게 되는 길에서 오히려 발견하는 게 더 많았으니 퉁쳐도 될 일이다. 그렇지만, 이날 이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너무 아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 조금 있으면 레온에 도착한다. 갈 길은 많이 남았지만 줄어드는 날에 아쉬움이 계속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