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에피소드를 만드는 것
45번째 제주 여행을 마쳤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기에 앞서 한 번 연습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퇴사하자마자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거의 첫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 용두암까지 걸어서 갔다. 그리고 용두암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걸었다. 나는 제주에 오면 거의 항상 서쪽부터 가기 때문에 습관적인 것도 컸다.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한 나는 환상자전거길과 해안도로, 일주로, 올레길을 활용했다. 이미 많은 이들이 러닝을 하고 있었다. 추레한 나의 모습과는 대비될 정도로 몸 좋은 사람들이 발을 맞추어 걷는 것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낸 뒤, 뜨거운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목적지인 애월항으로 갔다. 생각보다 많이 걸어서 그런지 많이 피곤했다. 오후 네 시가 되어서 도착했다. 차를 타고 애월항에 많이 들렸는데, 걸어서 다녀보니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친절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의 소개를 받으며 숙소에 들어가 휴식을 취한 뒤 저녁을 먹으러 나왔을 땐, 노을빛이 환상적이었다. 제주의 많은 하늘을 보았지만, 고된 일정 후에 본 그날의 하늘은 대단했다.
새벽 4시, 눈이 떠졌다. 첫날 무리하게 걸은 동생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 5시 반 정도 되었을까. 조용히 문을 열고 제주의 서쪽, 자구내포구로 걷기 시작했다. 협재, 금능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제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이다. 특히, 금능해수욕장으로 지나 만나는 작은 포구 월령이 더욱 그렇다. 7년 전, 죽으려고 찾아간 조용한 곳에서 힘을 얻어 살아 나왔고, 더욱 살고 싶은 마음으로 다시 찾았으니 감회가 얼마나 새로웠겠는가. 쏟아지는 눈물을 땀이라고 속여 가며 한참을 걸었다. 협재에서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며 지나간 사람, 올레길에서 툭 튀어나와 깜짝 놀랐던 한 아주머니, 말 안 듣는 리트리버를 산책시키고 계시던 한 할아버지, 힘내라며 응원하는 자전거 아저씨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재미있게 걸었다. 발에 크게 잡힌 물집은 터졌으나, 개의치 않고 자구내포구까지 씩씩하게 걸었고,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도착했다. 차귀도가 보이는 엄청난 풍경과 바람은 속이 뻥 뚫릴 정도였다. 이른 저녁을 먹으러 몇 군데 열지 않은 식당 중 한 식당에 들어갔을 때, 주인 할머니께서 참 재미지게 농담도 하시고, 갈치를 손수 발라주시며 첫 숟갈은 무조건 먹여줘야 한다고 하셨다. 안 먹으면 등짝 맞는다고 하셔서 웃으면서 받아먹었다. 그렇게 마무리된 둘째 날은 감회와 재미난 일들뿐이었다.
다음 날은 모슬포까지라서 거리가 길지 않았다. 일찍 눈이 떠졌으나, 7시가 되어서 출발했다. 발 상태도 썩 좋지 않아 어제 한 차례 수술(?)을 한 뒤였다. 다행히 짧은 거리였으니 망정이지 지금껏 걸었던 것처럼 걸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11박 12일의 제주 일정 중에서 가장 싸고 좋았던 숙소여서 그런지 나가기가 싫었다. 덕분에 잘 쉬었다.
제일 아쉬운 날은 넷째 날이다. 중문을 넘어 월드컵경기장까지 가야 하는 코스라서 상당히 긴 거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나왔다. 로비로 나왔을 때,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우비를 입고 나갔지만, 바람도 장난 아니게 불어서 우비를 입으나마나였다. 순례길에서도 이런 일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억지로 가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쉽지 않았다. 호우주의보와 강풍주의보까지 발효되어 전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2km 조금 더 걸었나,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호텔로 돌아왔다. 발 상태도 악화가 된 상태라 사실 쉬어 가는 게 맞긴 했다. 욕심으로는 걷는 게 맞았지만, 어쩔 수 없이 쉬어가자고 했다. 시간에 맞춰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를 타 중문으로 넘어갔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할 일이 별로 없어 마트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참 안타깝지만 충분히 쉴 수 있어서 좋게 생각했다.
다섯 째날, 계속해서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오늘은 비가 와도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5시경에 나왔다. 위미항까지 가야 해서 거리가 길진 않지만, 올레길로 갈 생각이어서 서둘러 나왔다. 어제의 비는 다 잊었는지, 날씨는 정말 좋았다. 덕분에 일출 시에 볼 수 있는 오메가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일출을 보면서 오늘은 어쩌면 돌고래를 볼 수 있겠다 생각했다. 올레길에 들어섰다. 굉장히 재밌었다.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계속해서 바뀌는 풍경에 지루할 틈도 없었다. 제주의 숨겨진 4.3 사건 유적지들을 지나치고, 이런 데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숨겨진 곳들을 보며, 빠르게 빠르게 걸었다. 힘든 것도 모르고 걸었다. 그러다가 한 바다를 만났다. 우연히 오른쪽에 있는 바다로 시선이 갔다. 저 멀리 돌고래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으려고 했지만, 금세 사라졌다. 기회가 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저기 멀리 보이는 정자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아직 한 번도 쉬지 않아서 겸사겸사 가방을 내려두고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다시 돌고래가 보였다. 해녀 아주머니들은 무언가 작업하고 계셨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돌고래들이 지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한참을 구경하느라 한 시간가량이 흘러버렸다. 해도 이미 많이 떠올라 더욱 강렬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름다움을 뒤로한 채, 다시 위미항을 향해 걸었고, 정말 좋았던 게스트하우스에서 잘 쉴 수 있었다.
여섯 째날, 같이 간 동생의 발 상태가 괜찮아져서 아침 일찍 같이 걷기로 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표선까지 걸었다. 마찬가지로 표선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올레길을 따라 걸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재미있는 길이었다. 어제보다 더욱 뜨거운 날씨 속에서 우리는 여름을 등 뒤로 하고 가을을 마주하며 걸었다. 어느 바다보다 따뜻한 제주 남쪽의 바다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응원을 보내주었다.
일곱 째날, 성산까지 가는 날이다. 물집도 물집인데, 무릎이 조금 안 좋아졌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지만, 일찍 나온 덕분에 오전 중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짐을 맡겨두고 점심을 먹고, 체크인을 기다렸다. 친절하신 사장님이 얼리 체크인을 해주셨고, 덕분에 휴식을 길게 할 수 있었다. 이날까지 특별히 맛없는 식당이 없었는데, 저녁에 크게 뒤통수 맞아서 조금 기분 나쁜 상태로 마무리할 뻔했으나 훌륭한 고기숙수와 돔베고기를 추가로 더 먹어서 다행이었다. 여행은 역시 변수가 재미나다.
총 9일 중에 여덟 째날이 가장 긴 코스였다. 원래는 김녕에 숙소를 잡으려고 했지만, 추석 이슈로 숙소가 없었다. 돈 없는 뚜벅이들은 큰돈을 숙소에 투자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함덕에 숙소를 잡았고, 덕분에 거리가 상당히 늘었다. 새벽 네 시반에 숙소에서 나왔다. 오늘은 해안길, 올레길로 가지 말고 최대한 일주로만 이용해서 걷겠다고 다짐했다. 거의 40km를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얼른 정류장에 들어가 우비를 입었다. 얼마 안 가 비는 그쳤고, 너무 습해서 우비를 벗었다. 조금 더 걷다가 비가 쏟아졌고, 다시 우비를 입었다.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심해졌고, 결국 스틱을 꺼냈다. 절뚝이는 발로 월정리를 지나고 있었다. 제주 도민 분이 생수 한 병을 주셨다. 정말 목이 타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가! “감사합니다, 삼춘!”을 외치며 계속해서 걸었다. 풍력 발전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녕에 다 왔다는 뜻이었다. 김녕에서 30분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길이 나왔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자전거 한 대가 오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서 우비를 주섬주섬 입고 있어서 그랬는지 잠시 멈추시더니 귤 두 개를 주셨다. 약간 오르막 길이었는데도 멈추셔서 같이 한 개씩 까먹었다. 좋은 여행되라고 하시면서 그리곤 쿨하게 가셨다. 함덕에 도착했다. 마지막 남은 1.2km가 지옥이었다. 저 멀리 숙소에 짐을 맡겨 놓은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새벽 4시 30분에 출발해서 12시 30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짐을 맡겨두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가고 싶었던 식당의 웨이팅이 너무 길어 바로 앞의 집으로 갔는데, 오히려 참 다행일 정도로 맛집이었다. 막걸리 한 잔에 모든 피로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38km. 정말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곤한 하루를 빨리 마무리했다. 내일은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용두암에서 시작해서 용두암으로 끝나는 약 240km 제주 한 바퀴 여행이 내일 끝난다고 하니 좀 아쉬웠다.
아홉 째날,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쉽게 용두암에 도착했다.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고, 우리의 여행은 오늘로 끝이 났다. 아쉬웠고, 정말 재미있었다. 제주 여행을 계획한 것은 결국 산티아고 순례길 때문이었다. 지난 60여 일 동안 나름 체력을 기른다고 했지만, 막상 수십 km를 걸어본 적이 없으니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보길 잘했다. 내 몸에 맞게 배낭도 맞추고,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물집에 대처하는 것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솔직히 걷는 것은 이래저래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게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서 걷는 게 힘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염두하고 걷는다면 괜찮을 것 같다.
인생은 ‘에피소드를 만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1초 만에 내 옆을 지나갔지만, 그들의 인사와 악수, 응원은 나의 걸음에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생수 한 병, 귤 하나, 지나가는 차량에서 빵빵 울려주는 소리, 숨겨진 4.3 관련 유적지들, 걸어보지 않았던 올레길들, 돌고래, 햇빛, 시원한 바람 등 제주의 모든 것들이 나의 이야기를 써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오를 순례길에서 써질 에피소드 역시 기대가 되었다.
인생은 참 어렵다. 힘들다. 괴롭다. 그래서 여행은 더러운 것을 잠시 덮어두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을 통해 써진 많은 이야기들은 인생을 다시 풀어나갈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부디 다들 좋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나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