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자, 너와 나를

순례길에 오른 이유 1

by 이뉴

먼저, 순례길을 알게 된 이유가 오늘 글에 등장하는 장소에 있다. 바로.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 이곳에 가기 위해 순례길에 올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내게 날아와 꽂힌 이 장소는 다녀온 지 세 달이 되어가는 지금도 활활 타오르고 있다.


스무 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철도 없고, 겁도 없고, 예의도 없던 혈혈단신의 미개했던 나는 왜 이 ‘용서의 언덕’이라는 곳에 꽂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걸어보니 알겠더라. 누구나 이 길을 오르면서 용서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고, 나아가 용서할 대상까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6시, 팜플로나. 도시의 가로등을 방향 삼아 한참이나 빠져나왔다. 1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팜플로나의 불빛이 비로소 적당해졌다. 그리고 30분을 더 걷고 나서 완전히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이른 새벽, 큰 도시 하나를 걸어서 빠져나가는 경험을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니 오히려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캄캄한 스페인의 새벽.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쏟아졌다. 나의 시골집에서도 가끔 이렇게 별빛이 쏟아지곤 했는데,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별들이 새벽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가쁜 한숨 한숨에 서리는 입김이 새벽하늘을 가로지르니 잠시 별빛이 흐려졌다. 내 입을 틀어 막아서라도 별 하나를 더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아직 저 구석 어딘가에서 홀연히 빛나고 있는 별 하나가 끝까지 저항해 보지만, 붉디붉은 강렬한 스페인의 태양을 이길 수는 없었다. 서쪽으로 향해 가는 순례자들의 길 위에서 해는 언제나 머리 뒤에서 떠올랐다. 해가 떠오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내가 걸어온 길을 자주 돌아봐야 했다. 나의 부족한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보랏빛을 머금은 엄청난 색의 향연은 이게 정녕 해가 뜨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지평선 너머 해가 빼꼼 올라오니 따뜻한 기운이 돋아났다. 새벽 내내 걸어 약간 추웠던 내 몸에도 온기가 돋았다. 내 앞에 가던 미국 청년(나도 청년인데?)은 잠시 걸음을 멈추어 팔을 벌리고 온몸으로 해를 마주했다. 그의 행동에 나는 잠시 넋이 나가 해와 그 청년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그렇게 온몸으로 맞는 기분은 과연 어땠을까.


가벼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오간 뒤 멀리 언덕이 보였다. ‘저기가 용서의 언덕인가?’하는 의문점을 가진 채로 계속해서 걸었다. 지도상으로 저쪽이 맞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길은 더욱더 좁아졌다. 사실 아직까지도 무릎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올라가는 게 살짝 부담이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드디어 용서의 언덕에 올라간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생각보다 괜찮게 올라왔다.





마침내 도착한 용서의 언덕.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이 보았던 순례자 형상들. 한쪽으로 팜플로나의 대도시가 펼쳐져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나바라 평야의 모습이 모였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은 나름 사진으로 많이 담은 사람이라고 자부심을 가졌는데, 여기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아무래도 순례길이 가지는 의미가 더욱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배낭과 스틱을 잠깐 내려놓고 앉았는데, 눈물이 났다. 멈추질 않았다. 여기 와서 울보가 된 기분이다. 여기에 서게 된 상황부터, 경제적인 부담감과 압박감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기까지 도와준 많은 사람들과 나 자신까지. 아주 단순하고도 복잡한 이 감정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혹여 누가 올까 올라온 길을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사실은 보이지 않았다.) 강제로 참으려 하니 눈물은 더욱 났다. 한참을 울고 나니 배가 고프더라. 배낭 꼭대기를 열어 두 개 남은 사과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프다니 인간의 삶은 참으로 어렵다.


몇 분 뒤, 차량 한 대가 오더니 외국인 두 분이 오셨다. 스페인 분들이었다. 콱 잠긴 목소리로 “올라” 인사했다. 그분들은 ‘올라’ 뒤에 뭐가 더 붙는 인사를 건네셨다. 몇 장의 사진을 찍으시더니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를 하시고 훌쩍 떠나버리셨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이미 이 정상에 오른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사람들도 한 두 명씩 올라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나에겐 너무 소중한 곳이었다. (신학생들의 농담으로 치면)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어쨌든 변화산 사건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사방으로 보이는 풍경에 인사를 하고 지옥의 내리막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옥의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멋진 하늘과 풍경이 발걸음을 계속 늦추게 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 도착했다. 오늘 내가 할 일은 먹고 쉬는 것보다 용서의 언덕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있을 수 없었다. 사실, 이 순례길은 지금 내 상황에서 무리인 일이 맞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빚도 많은 사람이 숨만 쉬고 살아도 모자랄 판에 두 달의 유럽 여행을 다녀온다는 것은 미친 일이 맞다. 그럼에도 이 무리한 결정을 한 이유는 처음 에피소드에서도 나오듯이 살고 싶어서였다.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린 후에는 더 이상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고 줄곧 생각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살지 않으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자리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오묘한 커피 향이 나의 인생을 돌이켰다. 혹자는 그 순간을 '신이 다녀간 순간'이라 표현한다. 젖은 옷을 털며 일어난 그 자리에서 돌이켜 흘러들어온 이곳, 이 회사.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내 인생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원하는 일, 원하지 않은 일이 교차로 벌어지면서 인생은 더욱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때마다 이것보다 비참해질 리는 없을 것이라며 버티고 또 버텨내었다. 하지만 더 살아보니 내 인생은 더 살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추락이 계속되었다. 이제 구멍조차 낼 수 없어 넝마가 된 내 마음에는 무엇하나 들 기운조차 없었다. 그래도 그때와 다른 선택을 했다. 그때는 바다에 몸을 던졌지만, 지금은 순례길에 몸을 던졌다. 마지막 인생의 불꽃이라고 한들 나는 여기를 걸어보고 죽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내 인생에게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하나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이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용서의 언덕은 나를 가장 많이 용서한 장소가 되었다. 나에게 짜증, 분노, 증오심 등등 온갖 역겨운 더러운 감정들을 남긴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보다도 나를 용서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순례길을 마치고 돌아간 나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다음 타인으로 이어지는 이 용서의 과정이야말로 상처 입은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이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그 일은 나에게 벌어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를 위로하고 쓰다듬었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상처까지 꺼내어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로 씻어냈다. 그리고 이날 일기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내일부터 진짜 순례길이 시작될 것이다.”



저 문장은 일종의 선언이자 정언명령이다. 앞으로 걸어갈 내 순례길에 대한 축복이다. 그리고 이 언덕을 기점으로 달라질 나에 대한 기대이다. 무수히 찾아올 파도에 대한 도전과 응전이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나를 후벼 파고 들여다보고 씻어낸 적이 있었을까. ‘성찰해야 한다’, ‘나를 위로해야 한다’는 말을 강연 중에 서슴없이 했으면서 정작 나에겐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어떤 면은 지독할 정도로 매몰차게, 다른 어떤 면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태하게 나를 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5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인 오늘까지. 15년 전 작은 씨앗을 죽이지 않고 잘 키워 여기에 오르게 한 나 자신이 순간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누가 들을까 침낭에 숨어 한참을 울었다. 순례길의 기적이 나에게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