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30km를요?

산솔에서의 하룻밤

by 이뉴

에스테야에서 정말 잘 쉬었다. 숙소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다음 날 지장을 줄 정도로 '왜 이 길에 서 있는지' 고민하다가 잠을 설쳐버렸다. 내가 항상 이렇다.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는데, 굳이 붙들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라는 동네로 가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산솔(Sansol)이라는 동네를 오기 전에 조사하면서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사람 많은 곳보다 사람이 없는 곳을, 도시보다 시골의 정취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솔을 선택했다. 심지어 ‘산솔’이라는 이름도 되게 예뻐 보였다. 하나 살짝 걱정이 된 것은 시작한 지 7일도 안 된 초보 순례자가 30km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산솔까지의 도전은 앞으로 나의 순례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길이 될 수도 있었기에 과감히 가보기로 결정했다.





6시에 나가려고 했는데, 아드리안 사장님이 잠깐 부르셨다. ‘아침 신청 안 했는데, 왜 부르실까’ 하는 마음으로 돌아봤는데, 잘 가라는 인사 때문이었다. 환하게 웃어주시길래 나도 환하게 웃으면서 ‘Gracias’라고 말했다. 나 때문에 일어나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배웅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기분 좋게 출발한 오늘의 발걸음엔 즐거운 일이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산솔까지의 여정은 길었다. 로스 아르코스라는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더욱 느껴졌다. 내가 얼마나 돼지처럼 살았는지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고작 이 정도 거리에 힘들다고 징징대니 말이다. 잠시 Bar에 들렸다. 길에서 만난 외국인들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자전거 타고 슝 지나간 어떤 여성분도 멋들어지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사람으로 꽉 찬 자그만 Bar 안을 요리조리 피해 힘겹게 주문하고 바깥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이런 요깃거리는 한국인들, 아니 나에게는 한입거리도 안 되었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만났던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길을 떠났다. 사람들에게 어디까지 가냐는 질문을 했더니 모른다고 했다. 하나같이 전부다! 완주할 때까지 적어도 내가 길에서 만난 서양인들은 딱히 목적지를 정해놓고 걷지 않았다. 나처럼 20-30km를 걷다가도 어느 날 50km씩 걷기도 했다. 정말 본받고 싶던 삶의 방식이었다.





스틱을 꺼냈다. 스틱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왔는데, 여기서부턴 도저히 안 되겠더라. 조금 듣기 싫은 스틱 딛는 소리를 들으며 산솔까지 도착했다. 되게 조용한 동네였다. 너무 좋았다. 순례길 1주차에서 제일 좋았던 곳을 뽑으라면 나는 당연히 산솔을 뽑을 것이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너무나도 평온했다.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서 떨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장님이 엄청 유쾌하게 나오셨다. 잘 못 알아들었지만,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알베르게는 산장 같았다. 스페인 분들이 엄청 친절하고 유쾌하다는 것을 이날 확실히 느꼈다. 체크인을 하고 숙소 소개를 받으면서 다음의 대화를 나눴다.


“오늘 여기 다 네 거야.”

“진짜예요?”

“오늘 손님이 너 하나야. 아직까지는!”

“정말 좋은데요. 저녁도 혼자 먹겠네요?”

“그렇게 되면 같이 먹자.”


이반 사장님은 정말이지 너무 웃겼다. 그의 말이 과연 사실이 될까. 오후 4시가 넘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7시 30분이니까, 오늘 정말 나 혼자 먹겠다 싶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내려오니 프랑스 마담과 그의 아들 율리가 있었다. (프랑스 마담 이름은 까먹었다. 사진도 찍었는데...) 그녀와 짧은 영어로 긴 시간 이야기를 했다. 사장님도 와인을 계속 주셨다. 마담의 아들에게 종이접기도 알려주고, 그에게는 달팽이 만드는 법도 배웠다. 한 병 반쯤 마셨을 때, 사장님은 퇴근하시고, 사장님의 친구분이 계속 자리를 지켜주었다. 어린 아들과 둘이서 걷는 순례길. 그래서 아주 천천히 가야 하는 그 길. 프랑스 마담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 들으면서 다양한 삶의 길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내 마음의 영역을 아주 조금 넓히게 된 기회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종이학 접은 종이 펼쳤다고 율리한테 혼구녕 났다.


그날 밤, 와인 두 병쯤 마셨을 때 식사는 끝이 났다. 서로 잘 자라며 인사를 나누고 내 침대로 올라갔다. 달빛이 은은히 들어오는 머리맡 창문을 꽤 오랜 시간 쳐다보았다. 지금도 순례길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제의 지독한 고민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산장 같은 숙소에서 아주 멋진 밤을 보내었다. 30km를 해냈다는 것도 한몫했다. 일정을 다시 한번 수정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 후 유럽 여행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30km 걸어보지 않았더라면, 정석적인 코스로 갔을 텐데 말이다. 역시 무엇이든지 해봐야 안다. 작은 다짐도 하나 했다. 앞으로 조금씩 더 걸어서 시골 마을에서 자겠다는 꿈 말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상상도 못 한 채.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