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몰되지 않기
투둑. 창문에 비가 부딪혔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창문 너머 보였다. 프랑스 마담과 그녀의 아들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 네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조식을 먹을 예정이라 좀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와인을 많이 마신 탓도 있지만, 편안해져서 그런가 잠도 잘 잤고, 또 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6시 30분. 비는 조금밖에 내리지 않은 것인지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 1층에서 소리가 났다. 사장님이 온 것 같았다. 프랑스 마담과 그녀의 아들도 일어났다. 아들은 눈이 부셨는지, 손으로 비비면서 화장실로 갔다. ‘굿모닝’을 순식간에 외치시더니 아들을 따라 화장실로 가셨다. 그녀의 뒷모습에 “불 켤게요!”라고 외치고 숙소 불을 켰다. 오늘은 특별히 1층에 안 내려가도 될 것 같았다. 짐 싸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날에 대부분 정리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배낭을 가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사장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지난밤 상당히 기대했던 조식을 먹게 되었다. 어젯밤, 사장님이 만든 빠에야가 일품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침도 기대를 했고,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의 순례길 첫 조식이 아주 성공적이었다.
성미가 급한 한국인이 1층에서 눈치를 보고 있으니, 사장님은 7시보다 빠른 6시 50분에 음식을 내주셨다. 그 덕에 7시 15분, 너무 늦지 않게 출발할 수 있었다. 돈을 지불하고 나가는 길에 사진 찍자고 했더니 흔쾌히 찍어주셨다. 그리고 사과를 하나 쓱 닦으시더니 손에 쥐어 주셨다. 계단에서는 프랑스 마담과 아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고개를 연신 숙이며 감사함을 전했고,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나도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늘은 누가 뭐래도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알베르게를 나서자마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뜸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음악을 틀었다. 까미노 닌자 앱으로 대충 방향만 잡은 뒤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까미노 표식은 나오니까. 45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 순간 표식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지로를 열어 확인해 보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행복과 신남을 과하게 느낀 것인지,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다. 로그로뇨(Logroño)에서 할 일이 많았는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되돌아가는 동안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어디서 놓친 것일까’, ‘오늘 늦으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온통 꽉 찼다.
다시 40여분으로 되돌아오면서 거의 두 시간을 날렸다. 과거가 되었으니 그 모든 것이 추억이고 낭만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당시에 그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보통 흘리는 땀이 아니라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돌아오는 길에 에너지를 다 쏟았더니만 앞으로 남은 길이 천 리길 같았다. 어쩌겠나. '이런 실수가 있어야 순례길이지'라는 생각으로 애써 씁쓸한 마음을 감춰보았다.
그래, 이런 길 하나 잃어버리는 것도 이렇게 긴장되고 어려운 것인데, 인생에서 길을 잃는다면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구나 한두 번쯤 길을 잃는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생의 모든 과정을 단 한 번의 걸음과 도약으로 가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이유는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맹신은 한 번 혹은 그 이상의 실수를 하게 된다. 잘못 잡은 방향을 어디에서 깨달을지는 사람과 그 사람이 경험한 일들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경우에 따라 영영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며,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사람도 있다. 뭐 어떠한가. 적응의 동물답게 맞춰서 잘 살고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이런 길은 다시 잘 찾아서 돌아가면 된다.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도 된다. 까미노는 어차피 연결되어 있으니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삶이 문제가 될 뿐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막대한 투자금을 가지고 초기 방향 설정을 잘못하게 되면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단순히, 다시 시작하면 되는 문제의 범위를 벗어나 버린다. 그러니 도전적이지만 신중해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 그리고 집중하는 것까지. 인간은 걸핏하면 두부 심부름하다가 PC방 가는 어느 아이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그래도 로그로뇨에는 무사히 그리고 힘들게 도착했다. 길에서 만나지 못했던 한국인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대도시에서 하려고 했던 일들도 잘 마무리했다. 이제 1주 차를 넘긴 순례자이니 개인정비에도 신경을 썼다. 아침마다 손이 차가워 스틱 쥐는 데 불편함을 느껴 장갑도 샀다. 유명한 로그로뇨의 타파스도 적당히 잘 즐겼다. 늦은 밤까지 즐거운 분위기인 스페인의 밤은 무거웠던 나를 조금은 들뜨게 해 주었다. 들뜸도 잠시, 숙소 문 닫기 전에 얼른 돌아왔다. 그리고 2주 차에 접어드는 나의 순례길에 평안이 있기를 기도하며 얼른 꿈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