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 입성 전, 시월의 마지막 밤

내게 남은 유일한 낭만의 날

by 이뉴

다시 6시. 문을 열자 ‘짤랑’ 거리는 방울 소리에 흠칫 놀랐다. 신중하게 문을 닫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목적지는 아헤스(Agés). 30km 살짝 못 미치는 구간이다. 지금껏 걸어온 것으로 보아 무난히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은 관계로 비가 오기 전 딱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 마을 아헤스는 부르고스(Burgos)라는 대도시 입성 전 마을이다. 조용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아주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11월 1일부터는 문을 닫는 알베르게가 많아진다. 오늘 묵는 이 숙소도 10월 31일이 마지막 영업일이라고 했다. 사실 먹을 게 마땅치가 않은 동네였다. 전날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사둘걸 싶었으나 어쩌겠는가. 대충 먹고 단 하루 밖에 없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즐겨야지.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거의 첫 가사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이라고 나온다. 1982년에 나온 노래이기에 나는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엄마가 좋아하던 노래였고, 기숙사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들었던 라디오에서도 무수히 많이 나왔던 곡이었다. 그 노래가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르면서 무작정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10월 31일을 의미 있는 날이라 생각했다. 이별이나 상실, 쓸쓸함이나 아련함 같은 감정은 당연히 잘 몰랐다. 중, 고등학교의 사귐과 헤어짐은 (적어도 나에겐) 가벼웠다. 노래가 가진 의미보다는 노래와 연결된 기억들이 하나둘씩 모여 시월의 마지막 밤을 완성시킨 것이다.


나도 인생을 살다 보니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멀어진 경험이 있다. ‘가을을 탄다’는 게 단지 우울이라기보다는 생각이 깊어지고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느낄만한 나이도 되었다. 그렇다 보니 어릴 적부터 각인되어 있던 이 시월의 마지막 밤을 순례길에서 맞이하게 되니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 분명했다.




점심 식사를 할 곳이 한 군데밖에 없었다.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식당이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조금 있었지만, 밥을 먹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어차피 순례길 위에 있는 마을이니 그들도 우리들을 이해해 주는 게 익숙한 듯 보였다. 저녁 역시 같은 식당으로 갔다. 순례자 메뉴를 또 먹지 않았다. 배는 매우 고팠지만, 와인이나 홀짝이면서 시간을 보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고 그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빨래를 걷어두길 잘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창문에 빗방울이 맺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를, 식당에 흐르는 음악 소리를, 그리고 내면에 소리까지 조용히 감상했다. 하나의 곡처럼 듣기 좋은 소리들이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된 순례길. 도착하면 쉬기 바빴던 나의 하루는 다른 것도 해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성당이 열려 있다면 들어가서, 열려 있지 않으면 근처 의자에 앉아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사진을 찍었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자로 붙잡았다. 괜히 스페인어로 한 마디 걸어보고 멋쩍어서 웃기도 했다. 작고 작은 일들이 모여 부족하게 시작한 나의 순례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서둘러 나왔다. 빗줄기가 조금 약해졌으니 한 바퀴 돌고 들어가고 싶었다. 바라건대, 이런 느낌과 감정이 한국에서도 이어지기를 기도했다. 경량 패딩에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해, 호다닥 숙소로 돌아갔다. 마을이 참 작아서 좋았다.


2025년 시월의 마지막 밤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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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