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가 이렇게 좋다니!

산보

by 이뉴

아침 7시. 나의 순례길에서 세 번째 조식. 이걸 세고 있는 게 우스울 정도로 여기 와서 아침을 잘 안 먹었다. 한국에서는 아침 안 먹으면 죽는 줄 알았던 내가 말이다. 마음대로 퍼먹으라는 숙소의 조식 시스템은 매우 탁월했다! 시리얼을 종류대로 다 먹어보고 입맛에 맞는 걸로 다시 먹는 돼지스러움(?)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커피도 시켰다. 나는 오늘 누구보다 굉장히 여유로웠다. 벌써부터 나가려는 분주한 외국인들의 모습을 통해 새벽 6시에 나가는 내 모습도 저렇게 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나도 출발했다.


아침 8시. 나는 곧바로 가지 않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어제 무리하게 온 이유로 자세히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늘 가는 마을은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 약 12km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내 걸음으로는 3시간 조금 안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천천히 가도 되었다. 나는 성터도 올라가 보고 성당도 자세히 보면서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다. 어제 저 멀리에서 보였던 마을 전경을 같이 떠올리면서 말이다. 순례길에 있는 작은 마을들은 똑같으면서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렇게 10시가 다 되었을 때, 천천히 출발했다. 시작하자마자 만난 거대한 오르막길에 잠시 혀를 빼꼼 내밀어 보고는, 누구보다 천천히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에 쉼터가 있었다. 그리고 멋진 풍경이 있었다. 메세타 평원이 은근히 고도가 높아서 이런 풍경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쉼터에 앉아 사과를 베어 먹으면서 각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이 적어 놓은 낙서들을 보았다. 한글도 참 많았다. 응원의 낙서가 작은 위로와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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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 개를 거의 먹어갈 즈음에, 꼴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 여기에 와서 오늘을 제외하고는 거의 숙소에서 1등으로 나갔다. 1등에 욕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새벽에 걷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을 마주치지 않는 것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에 걷는 길의 풍경을 잘 모른다. 아마 계획대로 왔다면 이 길도 새벽에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두 시간 정도 걸리는 마을로 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여유롭고 안정적이었다. 오늘 그 마을에는 묵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짧은 구간을 걸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음의 부담이 사라진 오늘 나의 여정엔 급함이나 조바심 등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쏟아지는 햇빛과 탁 트인 전경, 저 멀리 돌아가고 있는 풍력발전기들마저 아름다웠다.


꼴찌를 좋아하는 사람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없다. 부지런한 한국인들이 아무리 게을러도 이 길에서 늘 선두에 있는 이유도 그러하다. 이날만큼은 확실한 꼴찌가 되기로 마음먹으니 속도에서 한참 멀어질 수 있었다. 나의 눈동자는 거시적인 세계와 미지적인 세계를 오가며 정성스럽게 담았다. 새벽에 왔거나 혹은 빠른 발걸음으로 지나갔더라면 그저 그런 풍경이었을 이 아름다움을 말이다. 이것이 낭만이라면, 꼴찌 몇 번쯤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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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서, 오스카 아저씨를 만났다. 무척 반가웠다. 어제 45km 걸어서 오늘 여기서 잘 거라고 했더니 놀라움 반, 아쉬움 반의 표정을 남긴 채 또 보자며 힘차게 걸어가셨다. 오늘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부녀분들, 나헤라 가는 길에서 만난 뽀글 머리 청년, 대만 친구 등등 오며 가며 마주친 이들이 거기서 커피 한잔씩들 하고 계셨다. 그들과 한참 이야기한 후 그들은 그들의 길로 다시 들어섰고, 나는 체크인을 하러 들어갔다.


알렉산더는 가수 김태우처럼 생겼다. (그냥 내 생각이다. 반박 시 당신 말이 맞다.) 푸근한 인상만큼이나 유쾌하고 친절했다. 와이프로 추정되는 사장님도 낯선 이에게 친절함으로 다가오셨다. 여기까지 걸으면서 받아 보지 못한 특별한 왁스 쎄요도 찍어주셨다. 약간의 기부를 했어야 하는 것을 저녁때 알아차렸다. 체크인까지 조금 30여분 정도 시간이 남았더니 웰컴드링크를 고르라고 하더라. 그냥 주는 줄 알고 흔쾌히 “cerveza una por favor”를 외쳤으나 아니었다! 큰 상관은 없었다.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말 걸어 주시는 두 분에게 오히려 고마웠다. 이날 숙소는 나 혼자였다. 꼴찌로 왔는데 이런 호사까지 누릴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가.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에 늘 쫓기듯 살아왔고, 여기까지 와서도 그 버릇을 못 버렸다. 하지만 어제오늘 기가 막힌 변수로 인해 자연스럽게 꼴찌가 되었다. 그래서 좋았다. 거리가 짧았던 것도 있지만, 천천히 뒷짐 지고 걸어가는 그 시간이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과 숙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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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조금 추웠다. 순례길에 오르고 나서 처음 느껴보는 한기였다. 저녁을 다 먹은 뒤 알레산더가 따라오라고 했다. 방에 들어갔더니 벽에 있던 라디에이터의 반 정도 되는 이동식 히터를 가져와 작동법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내가 그것을 요청하려면 또 한 세월이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참 알 수 없는 도움을 받았다. 순례길에서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나도 그렇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달이 밝았다. 별도 많았다. 내일 다시 새벽에 나가는 나에게 분주함이 조금은 서운하다고 말할 정도로 오늘 나는 분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보다 게을렀기에 더 이상 여한도 없었다. 사장님이 준비해 주신 따뜻한 히터와 두꺼운 담요, 그리고 따스해진 마음까지 합쳐지니 오늘 밤은 꿈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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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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