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들이 꾸는 멋진 꿈에 대하여
조용히 내려가 1층 문을 열었다. 왼쪽에 소파가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있으니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났다. 들어온 만한 곳이 없었는데, 둘러보니 지붕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시끌벅적 요란스럽게도 내려온 고양이는 나를 조금 경계하더니 자기가 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준비를 마친 나는 6시 작은 쪽문으로 문을 열고 하루를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았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한 우비를 자연스럽게 쓰고 캄캄한 길을 묵묵히 걸었다. 오늘은 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까지의 여정이다. 특별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었다. 문제는 비였다. 카메라를 꺼내 촬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비가 내렸다. 어쩌다 비가 그쳐서 잠깐 모자를 벗으면 귀신같이 비가 내려 발끝까지 빗물이 타고 내려갔다. 덕분에 바람이 잘 통하는 얇은 바지가 홀딱 젖어버렸다.
bar도 들르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 12시 30분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니 귀신같이 비가 그쳤다. 예전부터 꼭 이랬다. 그래서 별 신기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알베르게 오픈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옆에 Bar에서 점심이라고 하기도 뭐 한 간식을 먹었다. 시간 맞춰 나오니 중년 부부가 줄을 서고 계셨다. 누가 봐도 한국인이었다. 쑥스럽게 인사를 드렸다. 그와 동시에 시간이 되어 주인장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곤 예약자 ‘Lee’를 찾았다. ‘It’s me‘라는 소리가 동시에 남편분과 내 입에서 나왔다. 김 씨, 박 씨, 이 씨가 우리나라에서 흔한 성씨라는 것을 5초간 잊었다. 주인장도 당황스러워했으나, 곧 다 같이 웃는 유쾌한 시간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부녀분들도 체크인하셨다. 어쩌다 보니 한국인들이 한 방을 쓰게 되었다. 한국분들이 저녁을 해주신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와인이랑 음료수, 딸기 등의 먹거리를 부리나케 사 가지고 왔다. 빨리빨리의 나라답게 5시가 되자마자 파스타면을 삶고 테이블을 세팅했다. 맛있게 나누어 먹으니, 시간이 금방 갔다. 내 또래쯤 되는 한국분이 늦은 시간 체크인을 하시더니 부리나케 밥을 지어 같이 식탁에 앉으셨다. 그분은 이틀 전 부르고스에서 출발하셨다고 했다. 여기까지 무려 160km 떨어져 있는데 말이다. 하루에 거의 80km씩 걸었다는 것인데, 뛰어오셨냐고 같은 자리에 있던 한국인들이 모두 같이 물어봤다. 트레일러닝을 하고 있다고 했고, 5일 뒤에 산티아고에 도착해야 한다는 그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세상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정말 리스펙이었다.
중년 부부분들도 그의 이야기 못지않았다. 이미 순례길이란 순례길은 다 걸으시고, 관광차 천천히 걷고 계시다고 했다. 살바도르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땐, 나도 언젠가 무조건 가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여행 마치고 캠핑카를 만들어 세계 일주를 준비할 것이라는 포부까지 들으면서 나도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뜨거워졌다. 마치 예전 어느 날처럼. 세상을 사는 방법엔 정답이란 있을 수 없다. 여행을 많이 하는 게 인생을 잘 사는 것도 아니다. 세상을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로 나눌 수 없다. 게다가 이 길 위엔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삶에 대해서도 쉽게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간혹,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 스펙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단한 경험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또 인생에서 반드시 옳은 길로 안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경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빗대어 볼 때, 여행이 내게 준 특별한 경험과 많은 사유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기초를 단단히 다지게 했다. 많은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여행이 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의 깨달음은 줄곧 여행보다 내가 당한 아픔과 상처를 통해서 얻은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그것들을 내놓고 말리며, 회복하고, 증명하는 장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어느 면에서 나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멋진 분들에게 드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설렘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나의 눈은 반짝인다. 그들이 한 여행을 나는 할 수 없으나, 그들이 말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린란드까지 다녀오신 그 트레일러닝 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어버리니,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나의 심장에 과감히 불을 던져 버렸다.
저녁을 먹은 뒤 일사불란하게 사용한 자리를 말끔히 치웠다. 이제 외국분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시간이기 때문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앉아 영어 듣기 평가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분들이 쏟아낼 멋진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달까. 여기 와서 줄곧 느끼는 것인지만, 멋진 사람들이 꾸는 멋진 꿈만큼은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오늘 밤은 다음 여행지인 아이슬란드를 생각하며 잠을 잘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