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ltreia
전날 밤, 6시 30분에 불을 켜기로 합의하고 잠에 들었다. 물론 나는 한참 전에 일어났다! 아침을 먹지 않고 나가려고 하는데, 누님이 바게트라도 먹고 가라고, 급하게 썰어서 하몽과 치즈 등을 끼워 넣어주셨다. 후딱 먹고, 중년 부부께 인사드렸다. 그분들도 진심을 가득 담아 나의 여행을 축복해 주셨다. 부녀분들께는 레온에서 뵙자고 인사드리며, 힘차게 문을 열고 나왔다. 하얀 입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두 시간 정도 걸었을까. 저 뒤에서 누가 불렀다.
“엥, 누구지?” 트레일러닝하시던 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그분은 잠시 내 속도에 맞춰주며 말을 걸어오셨다.
“어휴, 걸음이 빠르시네요. 벌써 여기까지 오셨어요?”
“아네요. 일찍 나와서 그래요. 아니 근데 진짜 대단하세요. 오늘은 어디까지 가시게요?”
“지금 살짝 근육이 올라와서 상황 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도 60km는 가지 않을까요?”
“아스토르가까지 가시겠네요.”
“그런가요? 가다 보면 알겠죠. 아참, 이거 어제 못 보여드렸어요.”
그린란드에서 찍은 오로라 사진이었다! 다음 여행을 아이슬란드로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분이 생각났다고 했다. 다소 전문적인 내용이 잠시 오갔다.
“펌프질 하려고 보여드렸어요!”
“아이고, 덕분에 꼭 갈 것 같습니다.”
“그럼 전 이만 다시 갑니다!”
“네, 몸 조심하시고요. 부엔까미노”
다시 본래의 속도로 뛰어가시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가볍게 뛰며 가시는 그분의 체력이 잠시나마 부러웠다. 레온까지 왔다는 것은 이제 남들의 모습이나 속도 따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인데, 나는 조금 수양이 부족한 것 같았다. 뭐 어때, 이만큼이면 나도 아프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잘 왔는데. 그것이면 충분했다.
저기 멀리 레온이 보이시 시작했다! 어느덧 19일 차, 레온을 지나고 나면 나의 순례길은 후반부에 접어든다. 이제 남은 거리가 온 거리보다 적다는 뜻이다. 하나하나 지나온 곳을 구글맵에 점을 찍어보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이런 여행, 이런 경험을 머리털 나고 처음 해보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도시 외곽에서부터 천천히 시내로 걸어왔다. 이전의 지나온 대도시들과는 비슷한 면도 많았지만, 다른 점도 참 많았다. 기분 탓이어서 그랬을까. 훨씬 더 웅장하고 대도시 느낌이 났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추웠다. 11월 8일이었으니, 당연한가.
레온에 있는 한인 민박에서 멋진 밤을 보냈다. 이제 정들었던 동지들과 헤어진다. 며칠 전부터 오스카며 후배님이며, 길에서 자주 마주쳤던 한국인들과 한 명씩 헤어졌다. 이제 이분들과 오늘을 끝으로 헤어진다. 같이 걸은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헤어진다는 게 왜 그리 아쉬운지. 누님의 아버지이신 할아버지의 깊은 포옹과 나에게 건네는 말들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을 넘어 나를 있게 해주는 말들이 되었다.
조용한 방에 누워, 나를 더 살펴보게 되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지난 18일의 시간이 꿈만 같았다. 이제 하루하루 줄어드는 게 아쉬웠다. 날마다 걷더라도 시간이 멈추거나 혹은 아주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도피성인 이 여행을 끝으로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현실은 최악에 최악을 딛고 있었고, 내 마음 상태도 비례하여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년 만에 이루는 꿈’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은 이 길에서 내세울 게 없는 내가 내미는 마지막 자존심 한 덩이에 불과했다.
알고 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길은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는 것을. 모두 다른 경험과 지식, 지혜를 가지고 걷는 것을. 깨달음이란, 마치 누군가가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다른 깨달음을 얻고 성장한다는 것을. 오르기 전에도 알고 있었던 인생의 진리가 이제와 내 안에서 체화되고 있었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들을 이뤄낸 사람들을 보며 경외감에 가득한 눈빛으로 볼 게 아니었다. 존중과 존경을 듬뿍 담되, 나는 나의 것을 만들면 그만이다.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 이렇게 순례길에 올랐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내 인생 최대 업적을 순례길에서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다소 부담스러운 하얀 이불을 덮고 어두컴컴한 레온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가끔씩 질러대는 고라니 같은 소리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한 밤이었다. 나와 그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