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타 평원을 좋아합니다

순례길에 오른 이유 2

by 이뉴

메세타의 마지막 구간을 끝냈다. 이제 내일부터 본격적인 산악 구간이다. 일기예보 상 원래 이번 주 날씨가 계속 안 좋았는데, 역시 아침부터 비가 왔다. 단체 한국인들의 시끄러운 소음을 부끄럽게 느낄 시간도 없이 5시 30분에 배낭을 정리하러 나왔다. 대충 정리한 뒤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우비를 뒤집어쓰고 5시 50분에 출발했다. 비는 한 시간 정도 더 내렸다. 더 이상 오지 않자 우비를 배낭에 걸쳐놓고 길을 걸었다.




몇 마을 지나 갈림길이 나왔고, 일부러 산 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쪽으로 가길 잘한 것 같다. 솔직히 한 동안 평지만 걸었으니 워밍업 겸 경사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안개가 밀려오는 숲 속에 난 순례길은 낭만적이고 몽환적이었다. 오늘로 순례길 3주 차를 마무리하는데, 그 기간에 맞게 아주 고요한 숲 속이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비해 나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로지 가야 한다는 마음만 계속해서 앞섰다.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름 정리가 필요한 알맞은 시점에 순례길에 오른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자면서 ‘정말로 그러한가’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냥 걷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그 단순함 속에서 무엇인가를 얻어지길 기대하는 요행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아닌가 싶었다. 이제 정확히 열흘 남은 시점에 나를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생각했다.


20251230-P1010509.JPG
20251230-P1010501.JPG
20251230-P1010506.JPG


그런 이유로 오늘 메세타를 끝내면서 오길 참 잘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고된 하루의 끝에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돌볼 수 있는 혹은 반성하고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저 소주 한 병 탈탈 털어 넣는 것으로 끝마치기 바빴다. 어느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병들어갔고, 지쳐갔다.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순례길, 특히 메세타의 지루함은 감사한 일이다.




세상은 의외로 역설로 가득하다. 오르락 내리락도 덜한 평탄한 길, 걸어도 걸어도 바뀌지 않는 풍경, 그래서 어느 누구에겐 최악의 길일 수 있는 이 길은 의외로 나에 대해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걷고 나면 나도 모르는 새 고작 한 뼘이라도 자라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초를 다지는 것은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다. 견뎌낸 자만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좋은 성과까지 잡게 된다.


다시 이 길에 서게 된다면, 같이 걸었던 할아버지처럼 감사의 제목을 만들어 기도하며 걸어봐야겠다. (물론, 지금도 할 수 있지만)


20251230-P1010514.JPG
20251230-P1010513.JPG
20251230-P1010515.JPG


수, 토 연재
이전 18화오늘은 나에게만 집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