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불청객(1)

불안

by 이뉴

폰세바돈과 폰페라다, 이틀 간의 여정은 조금 종교적인 이야기로 써보려고 한다.


우비를 잃어버렸다. 심지어 장갑도 잃어버렸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리만큼 정신이 나가 있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감기로 인해 컨디션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물건을 잃어버리다니. 비가 안 오길 간절히 바라야지. 오늘은 폰세바돈까지 가는 날이다. 후반부에서 만나는 첫 번째 산이다. 그래도 지금껏 걸어온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별 힘을 들이지 않고 무사히 도착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마음에 검은 구름이 찾아왔다. 그것은 곧바로 좁디좁은 내 마음을 순식간에 덮었다. 불안, 그놈이 다시 찾아왔다.





순례길에 오르면서 두 가지 말씀이 걸렸다. 하나는 오늘 이야기할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수백 번 들었을 내용이다.


지금껏 나의 모든 글에는 불안 그리고 비참함이 묻어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힘이 들어서 그런 거냐고 묻는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할 이야기가 많다. 직관적으로는 가난에 대한 이야기부터 되겠지만....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역도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느끼며 살아왔다.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 한두 번 있던 게 아니었다. 그래서 머리로도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도 느끼며 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꽤나 훌륭하고 성숙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모든 순간에서 신을 찾고 감사하려 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당신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기 바빴다. 그것이 나에겐 정답이자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온 지 7년. 7년의 시간 동안 나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아픈 사람은 많아지고 그럴수록 더욱 세게 억누르는 책임감과 부담감은 ‘이제 그만해!’라고 항복을 외쳐도 좀처럼 조여옴을 풀지 않았다. 심판이 없는 이 인생이라는 링 위에선 나는 그저 맞을 수밖에 없었다. 기어코 나는 링 위에 쓰러졌다. 어디선가 카운트 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열까지 세는 그 시간이 왜 그렇게 짧은지, 나는 일어날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패자가 되었다.




그 뒤로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우울과 함께 긴 방황의 숲으로 들어갔다. 다른 의미로 돌이켜보니 내 삶은 힘들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은혜가 된다.) 그럼에도 감히 하나님께 말로 따질 수가 없었다. 나의 이성은 온통 신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하니 어떤 논리와 감성으로도 따져 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할 수 있는 한 온몸으로 거부했다. 계속해서 멀어지기만 하는 나의 이 비참한 삶. 여기가 끝인 줄 알았던 삶의 밑바닥이 매해 갱신되고 있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들의 연속. 이제는 하다 하다 못해 내가 하나님께 무슨 큰 죄를 저질러서 그런 것인가 하는 미신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상한 갈대는 꺾지 않으시고, 이름 모를 들풀까지도 먹이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우리를 돌보지 않는 것일까. 지나온 모든 순간순간들이 은혜보다는 억울함으로, 분노로, 끝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다 이 성경 구절을 보게 되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딸이 아프니 마을을 지나가시는 예수를 붙잡고 애원한다. 하지만 예수는 언약된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신다. (언약된 백성은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한다) 하지만 가나안 여인은 포기할 수 없었다. 더 낮은 마음으로 더 낮은 자세로 예수께 엎드린다. 예수는 자녀들 즉, 이스라엘에게 가야 할 것들이 개들에게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모욕의 언사를 던지셨다. 그렇다고 포기할 가나안 여인이 아니었다. 자신을 개라고 부르는 못된 예수가 안타깝게도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에게 나아가 ‘자신이 개가 맞다’며 한없이 낮춤과 동시에 개밥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먹는다고 답한다. 그러자 예수는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다. 나는 이 말씀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회에서는 ‘부스러기 은혜’라는 아주 예쁜 말로 전해졌다. 하지만 교회를 둘러보고 세상을 둘러보아라. 비교는 백해무익하다만, 부스러기조차 감사하다고 받아야 하는 삶보다 넘치게 받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부스러기라도 구걸해야만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비참함. 그녀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그럼 나는? 나를 만드시고 내 삶을 이끄시는 예수께서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비참함을 나에게 느끼게 할 작정이신 걸까. 내가 가나안 여인만큼 진심이 아니란 것인가. 감당할 수 있는 고난과 역경을 주신다면서 지금 나의 상황이 그러한가. 집어삼킬 듯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죽음힘을 다해 '부딪혀 보자', '넘어보자' 식의 결심을 백날 하면 무엇할까. 파도가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히려 축복은 고사하고 내게 저주를 내리시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가나안 여인은 그 비참함을 뚫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결국은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렇다면 나도 가능한 것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은 나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틀 동안 심하게 싸우며 걸었다. 내가 어디까지 비참해지는지 궁금하신 거냐고. 어디까지 낮아져야 당신의 그 도우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이냐고. 솟구쳐 오르는 분노는 더 이상 이성이 통제할 수 없었다. 나이만 먹었지, 여전히 기대고 싶은 이 비참한 실존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계실 것인지 묻고 또 물었다. 하늘은 어제와 같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나안 여인도 그랬을 것이다. 예수 뒤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의 비웃음과 예수의 냉담한 반응까지. 그 여인은 얼마나 춥고 외로웠을까. 그래도 가나안 여인은 성공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고 돌아갔으니 말이다. 나는 얻고 돌아갈 수 있을까.




바람이 심하게 부는 마을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작은 bar의 문이 바람에 쾅쾅 닫히기를 수십 번이나 한 뒤에야 나는 시선을 창밖에서 앞에 놓인 커피잔으로 옮겼다. 작은 잔에 피어오르던 하얀 김이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마치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조용한 bar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각자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며 가며 마주친 국적 모를 사람들과 작은 인사를 나누고 밖을 나갔다.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감기에 걸려 목이 잠긴 것인지, 몇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아 잠긴 것인지 모를, 그 두 경계에서 한껏 소리쳐 보았다. 그렇다고 불안이 떠나가지 않았다. 알베르게 문 옆에 있던 고양이 몇 마리가 등을 세우고 나를 째려보았다.


작은 알베르게에 오스카와 후배님 그리고 여러 번 마주쳤던 한국 청년들과 함께 꽤나 아늑한 저녁을 보냈다. 침상에 누웠을 땐, 시끄럽게 불어대는 바람 소리가 내 심장에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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