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 오른 이유 3
저녁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다행히 새벽에 내리는 비의 양이 많지 않아서 크게 겁을 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사실, 24일 차를 맞는 순례자에게 크게 두려울 게 없긴 하다. 나가기 전에 알약 하나 먹는 것을 잊지 않았다. 초반에 감기에 걸릴 줄 알았더니만 후반부에 걸려 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오늘은 순례길에 오른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서 말할 차례이다. 바로 tvn에서 방영한 ‘스페인하숙’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예능은 수십 번 보는 성격상 당연히 이 방송도 골백번도 더 본 예능이다. 순례길에 대한 로망은 늘 가슴에 있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리고 보고 또 보면서 세월의 모진 바람에 식어가던 작은 불씨를 기어코 살려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순례길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순례길과는 인프라적으로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특히, 한식이 그랬을 것이다. 지금이야 대도시에서 충분히 살 수 있기에 솔직히 한식이 엄청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이 알베르게에 방문하는 손님들은 대부분 반가운 표정들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적 불문하고 식탁에서 순례자들끼리 나누는 대화와 쉬는 시간에 출연진들과 나누는 몇 마디에도 진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그래서 이 마을, 비아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가기 위해 순례길에 올랐다.
쉽지 않았다. 비가 와도 너무 많이 왔다. 우비를 쓸 이유가 없을 정도였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감격스러웠지만,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 방송에 나온 장면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미처 전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방송에 나온 알베르게는 꼭 보고 싶어서 광장을 지나 그 알베르게로 갔다. 당연히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변했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 별로였다. 광장은 그대로여서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됐다(?). 섭섭한 알베르게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전날 만난 한국 청년을 만났다. 오늘 뭐 40km 정도 걷는다고 했었는데, 배고파서 쉬고 있다고 했다. 비가 많이 오니 잘 챙기시라고 짧은 인사를 나누고 나는 숙소를 찾아 떠났다.
오후 1시에 체크인이었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도착했다. 어쩔 수 없이 숙소 앞 구석에 가방을 내려두고 우비를 털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남자 사장님이 오시더니 젖은 가방을 들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일찍 체크인을 해주겠다고 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고마울 수가! 비가 너무 많이 온다며 몸은 괜찮냐부터 시작해 정말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숙소는 정말 좋았다. 1층 침대도 그렇지만, 향도 좋았고, 무엇보다 춥지 않았다. 홀딱 젖은 낯선 외국인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모습은 이 마을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느꼈다. 어차피 순례길 위에서 사는 그분들의 삶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것.
점심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대도시에서만 보통 돈을 쓰고 작은 마을에선 사과 먹거나 빵을 먹는 등으로 저녁을 해결했었는데, 여기서만큼은 원 없이 먹고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Amigo”하며 달려오는 사장 Juan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와인도 계속 채워줬다. 나의 부족한 말솜씨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들어주고 잘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세상 일이 이렇다. ‘순례길에 오른 세 번째 이유’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고 싶었지만, 정작 눈으로 확인한 그 세 번째 이유는 섭섭했다. 하지만 그 섭섭함은 금방 잊힌다. 진심이 느껴지는 친절과 따뜻한 공간, 맛있는 음식 앞에서 모든 것이 누그러진다. 아마, 잘못을 저지를 사람이 내 앞에 있었어도 쉬이 용서를 할 터였다. 만약 이런 이유라면 나는 순례길에 오른 세 번째 이유를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며칠 째 감기와 신과의 혈전(?)을 거듭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이 이날 이후로 다시 회복됐다. 그런 의미로 참 감사한 날이다.
이제 딱 7일 남았다. 내일부터 이어지는 마지막 산을 넘으면 나는 꿈에 그리던 ‘별들의 들판’을 눈앞에 둔다. 언제부턴가 순례길에서의 하루가 정말 소중해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줄어드는 날짜가 아쉬웠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어쩌겠는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해가 쨍쨍 내리쬐거나 한들 나는 내일이면 또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걷다 보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겠지. 모르겠고, 남은 7일을 알차게 보내겠노라 다짐했다. 다만, 비는 좀 덜 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