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친 걸까

아, 오 세브레이로까지 갈걸...

by 이뉴

어김없이 5시에 눈이 떠졌다. 세탁기가 있는 공간으로 나갔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어제 사둔 사과랑 먹다 남은 빵을 우걱우걱 먹었다. 신발이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굉장히 찝찝했다. 잔뜩 구겨 넣은 신문지를 모두 빼내어 휴지통에 잘 버린 뒤, 신발을 신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좋았던 기억만 남은 이 숙소에 며칠이라도 더 머물렀으면 하는 충동이 몰려왔지만, 어쩌겠는가. 모두가 잠든 이른 아침, 아무도 보지 못할 테지만, 힘차게 손을 흔들며 마을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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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여정은 ‘오 세브레이로’라는 정상에 있는 마을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길도 험하고 비도 온다고 하기에, 무리하지 말자 싶어서, 그전 마을인 ‘라 라구나’라는 마을로 결정했다. 보통의 순례자들은 정상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때문에, 사람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당연히 비 때문이었다.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는데, 오르는 게 무척 힘들었다. 25일 차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뚝이며, 오롯이 스틱에 의지해 산을 올랐다. 거의 첫 주를 제외하고는 목적지까지 5-6시간 안쪽으로 도착했는데, 이날은 2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비가 내렸고, 어제 흠뻑 젖은 신발이 다 마르지 않은 것도 한몫을 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힘들었다. ‘오 세브레이로’로 가기 위해 대개 쉬어 가는 곳인 이 작은 마을 ‘라 라구나’에 도착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알베르게는 한 곳 밖에 없었고,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어 조금 애먹었으나 무사히 체크인도 했다. 빨래도 돈 쓰는 김에 그냥 맡겨버렸다. 너무 귀찮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 내려오니, 엊그제 만난 한국인 단체 관광객 중 한 분이 먼저 오셨다. 전에 있던 숙소에서 듣기로는 다리가 안 좋으셨다고 들었는데, 결국 가이드 분이랑 같이 점프해서 오셨더라. 가볍게 인사하고, 먹거리를 주문했다. 무슨 맛인지는 잘 모르겠고, 살기 위해서 먹었다. 빨래를 받아가지고 숙소로 올라갔다. 계속 자고 쉬었다. 딱히 볼 곳도 없었으며, 날씨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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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시가 되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산 마르틴에서 만난 아저씨도 계셨다. 한국인들도 오기 시작했다. 왜 다 이곳으로 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11월 14일인데, 이제 순례길엔 비수기가 없는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인사하고 다시 눕고를 수십 번 반복했을 때, 드디어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남들은 다 저녁 먹으러 간다고 했으나 나는 그냥 숙소에 있겠다고 했다. 약이나 한 알 먹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칠 만도 했다. 대도시에서 연박을 하면서 나름 즐기겠노라 다짐했던 찬란했던 계획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다시 돌아갈 한국에서의 삶을 이어가려면 하루라도 빨리 직장을 구해야만 했고, 들고 온 돈도 적었기에 많은 시간을 유럽에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하루 쉬지 않고 걸었다. 여유는 느꼈지만, 막상 여유는 사라진 이 알쏭달쏭한 사이에서 나는 계속 서 있었다. 그러니 지칠만했다. 레온을 지나면서 비를 계속 맞았고, 누적된 피로와 감기로 인해 지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삼시 세 끼를 목에 칼이 들어와도 챙겨 먹었던 사람이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았으니 정신력과는 다르게 체력은 닳는 게 정상이었다.


좋게 생각했다. 어쩌겠는가.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라지만 이렇게 푹 쉬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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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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