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언덕을 넘어

카운트다운 시작

by 이뉴

끼익 대는 방문을 조심히 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제 짐 싸는 데 달인이 되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아무렇게나 넣어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다행히 전날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지 않아서 신발은 다 말라 있었다. 문을 열자 폰세바돈에서 불었던 심한 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확실히 고지대 산이라 그런지 날씨가 참 변화무쌍했다.


처음 올라가는 길은 살벌했다. 바람은 여느 때보다 세차게 불었다. 솔직히 전날 조금 무리해서 ‘오 세브레이로’까지 갈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다. 꾹 참고 가는 수밖에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어젯밤 실컷 자고 쉬어서 그런지 오늘은 어제만큼 힘들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캄캄한 새벽, 산길을 부지런히 올라 정상을 통과하였고, 해가 뜰 무렵엔 멋있는 산세를 바라보며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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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마지막 봉우리에 올랐을 때, 쉬어갈 겸 작은 bar에 들렸다. 대형견 두 마리가 bar 안을 어슬렁 거렸다. 덩치가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나 막상 순둥이들이었다. 커피와 음식은 비싸지도 않고 싸지도 않은 적당한 가격과 ‘먹을만하네’ 수준의 맛이었다. 대충 먹고 강아지 조금 쓰다듬다가 어제 만난 중국 사람과 눈인사를 했다. 커다란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좀 대단해 보였다. 문을 열고 나오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젠장. 지금부턴 트라아카스텔라까지 계속 내리막이긴 했으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오기 시작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죽겠구나 싶은 생각이 다시 들 정도였다.


간신히 말려놓은 신발인데, 또다시 푹 젖어 버렸다. 이게 순례길 매력이겠거니 하며 웃어넘겼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들이 머리부터 흘러내렸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오늘의 산악 구간이 참으로 얄궂게 느껴졌다. 마지막 언덕이라는 생각이 드니 기대감도 들었지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참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다시 들었다. 쫙쫙 달라붙는 바지자락을 겨우겨우 떼어 내며 빗속을 걸었다. 카메라도 핸드폰도 더 이상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시기, 이 지방에 비가 많이 온다는 것을 알고 왔지만, 날마다 그 놀라움을 갱신했다. 돌이켜 보니, 진짜 하루하루가 기적과도 같은 날이었다.




트리아카스텔라 마을은 조용했다. 순례길 위해서 만날 수 있는 여느 조용한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마트도 있고, 식당도 있으니 엄청 적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늘 그렇지만, 마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귀신같이 비가 멈춘다. 우비도 개고, 스틱도 접어 정리한 뒤 조금은 무섭게 생기신 사장님께 체크인을 했다. 영어는 잘 되지 않았으나 상대방도 나도 무슨 말을 하는지 지금쯤이면 대략 알 수 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외모와는 다르게(?) 상당히 친절하셨다. 이것저것 꼼꼼하게 챙겨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친절함에 감동했다.


내일은 사리아로 간다. 100여 km 남은 지역이자, 긴 시간을 낼 수 없는 순례자들이 짧은 여정으로 출발하는 곳이다. 두 가지 길이 있다. 사모스 수도원을 거쳐 가는 길과 산실코스로 짧게 가는 길. 처음 계획은 수도원을 거쳐 가려고 했으나, 내일 역시 비가 상당히 온다고 예보가 되어 있었기에 짧은 코스로 가기로 했다. 계속해서 마지막을 생각하게 된다. 다섯 손가락만 접으면 마치게 될 나의 이 여정이 자꾸만 생각났다. 괜히 카메라도 켜보고, 핸드폰 앨범도 뒤적였다. 일기도 다시 읽어보고, 웃픈 에피소드들도 돌이켜 보았다. 창대했던 나의 이 순례길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마지막 언덕을 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어쩌면 이 사실이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삶을 살 나에게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때론, 알 수 없는 희망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맹목적인 희망도 내게는 도움이 될 때가 분명히 있었으니,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삶이란 지옥 같기도 천국 같기도 한 것 같다.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묻어 나와서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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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