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아 이대로 멈추어다오

사리아-포르토마린

by 이뉴

계속된 비 영향으로 사리아로 가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산실 코스로 방향을 정했다. 비교적 짧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7km의 거리가 그리 쉽지 않았다. 비, 그놈의 비가 계속해서 문제였다. 그래도 12시 전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가 아직 정비되지 않아서 밖에서 조금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니 못 보던 한국인 청년 두 명이 왔다. 군대 전역하고 친구랑 왔다고 했는데, 왜 지금껏 한 번도 못 봤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리아에서 묵은 숙소의 부부 사장들은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껏 들떠 있는 모습에 이유를 물어보니 내일부터 쉰다고 하더라. 그래, 알베르게가 11월 중순이면 그래도 오래 열었다 싶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많은 이들이 숙소를 찾았다. 그리고 10시 넘어서까지 주방 및 식당에서 이야기를 하더라. 별로 끼고 싶지 않은 한국인들이었기에, (벌써 며칠 전부터 신경이 쓰였던 그룹이었다.) 벽 하나를 두고 있는 침대에서 이어폰만 꽂은 채 빨리 잠이 들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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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역시 6시가 되자마자 발걸음을 옮겼다. 포르토마린이라는 마을로 가게 되었다. 그래도 하나 다행이었던 것은 어제만큼 비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진짜, 순례길 후반부 내내 내리는 비 덕분에, 더욱 특별한 기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포르토마린이라는 동네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어디선가 보더콜리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자기 얼굴을 내 다리에 비비더니 내 앞에 서서 길을 가는 것 아니겠는가. 코너를 돌아 집이 한 채 보이길래, ‘저 집이 얘 집인가’ 보다 했으나 웬걸, 제 집 들어가듯 들어갔다가 휙 하고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러고는 또다시 내 길을 인도하듯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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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토마린을 들어갈 때, 생각보다 아찔한 다리 하나를 건넌다. 좌우로 펼쳐진 멋졌을 강은 날씨 덕분에 전혀 멋지지 않았다. 온통 잿빛으로 가득한 이 하늘이 닿는 지점 역시 잿빛투성이었다. 보더콜리는 차선을 왔다 갔다 하며 아찔한 걸음을 이어나갔다. 그 동네 사람들은 그 개가 익숙한 듯 알아서 잘 피해 갔다. 내가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 찍기 위해 걸음을 잠시 멈추면 그놈도 걸음을 멈추어서 뒤를 돌아 나를 봤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그놈도 똑같이 앞으로 갔다. 무슨 이런 경험이 다 있는지 스페인 와서 동물 친구들과의 이상할 만큼 접촉이 많았다. 다리를 다 건넜을 땐, 건너편 횡단보도에 서 있는 어떤 여자분에게 달려가더니 애정표현을 하더라. 예상하시겠지만, 그분이 주인은 아니었다.


그 개는 언덕으로 되어 있는 포르토마린 마을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날 더 이상 따라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든 채로 얼른 숙소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운영하시는 알베르게였다. 온통 수기로 되어 있는 그 알베르게 시스템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골에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1등으로 도착한 숙소를 신나게 설명해 주시는 할머니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나는 순례자의 일과를 빠르게 끝냈다.


그날 숙소는 계속 보던 한국인들을 필두로 며칠 전에 본, 베네수엘라 아저씨부터 많은 외국인들로 만실을 이루었다. 아마도 사리아부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구간이라 그런 것 같았다. 특히나 유럽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것은 순례길을 언제든 와서 걸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번엔 여기까지만 걷고, 다음에 와서 다시 걸을 거라고 말하는 그 여유와 베짱이 참 부러웠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모든 유럽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꽤나 높은 확률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제 3일.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방안, 꽤나 요란하게 들리는 주방에 집기 소리들, 여기저기 들려오는 다양한 언어 등등 처음엔 불편했던 것이 익숙해져 버린 지금 이 순간. 나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 일종의 도피 아니겠는가.


사실, 며칠 전에도 언급되었지만, 이 여정은 15년이라는 아름다운 포장지로 잔뜩 싸맨 도피성 여행에 불과했다. 그러니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할 나는 도피 아니고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불경스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설렘과 흥분을 최고조로 느끼며,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걸었던 초반부의 순례길이 어느덧 나의 일상적인 하루가 되었다. 30일도 걷지 않은 녀석이 마치 몇십 년을 걸은 사람처럼 익숙해졌다. 건방지게 말이다. 그렇다 보니 여행할 때, 되도록 아쉬움을 남기고 오자는 결심이 이번엔 들지 않았다. 후회 없이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올지 안 올진 지금 모르지만, 어떤 선택이 되든 이 순례길이 내 인생의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각오로 잘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굳건한 결심을 한 채, 들어갈 때마다 머리를 쿵 찍는 작은 벙커 침대 1층에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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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