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지심

이 마음 확 사라져라!

by 이뉴

어젯밤, 할아버지께 내일 6시에 나갈 건데, 문 열려 있는지 조심히 물어봤다. 아, 물론 GPT가 물어봤다. 나도 사장님 내외분들도 영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번역기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문은 안 되고 옆에 쪽문으로 나가라고 알려 주셨다. 나의 이 질문은 매일 반복되었는데, 로그로뇨에서 갇힘 사건 이후로 생긴 일종의 버릇이었다.


작은 쪽문을 열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크게 집어넣었다. 좁은 침대 덕분에 밤새 쪼그라든 폐가 확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박하의 무언가를 먹은 듯한 느낌이 식도를 타고 쭉 내려갔다. 이래서 새벽의 공기를 끊을 수가 없다.




오늘 가는 마을은 팔라스 데 레이. 여기서 대략 25km 조금 넘는 거리의 비교적 가까운 마을이다. 오늘 숙소가 인종차별이니 뭐니 하는 리뷰들이 많아서 걱정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저 뒤에 떼로 몰려오는 스페인 남정네들부터 보내야겠다 싶었다.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더니 기어코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들의 MBTI는 전부 EEEE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굉장히 높은 텐션으로 나에 대한 호구 조사를 시작했다. 스페인 청년 4명에게 둘러 쌓인 나는 재미보단 두려움이 앞섰다. 그렇게 30분을 걸었나. 나 스스로 영어로 어버버 대는 게 싫어서 커피 마시고 간다고 하면서 때마침 나타난 작은 Bar로 들어갔다. 어휴, 살았다.


작은 빵하고 카페 콘레체를 시켰는데, 별 맛은 없었다. 맛이 없을 수 없는 커피인데, 이상하게 맛이 없었다. 리뷰를 보니 평점이 박살 난 bar였다. 골라도 이런 데를 고르다니... 이것도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하며 후딱 길로 돌아왔다. 아침에 살짝 내리던 비는 어느덧 그쳐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몰려왔지만, 이때다 싶어 속도를 올려 무사히 마을에 도착했다.


숙소 관련해서 인종차별은 없었다. 걱정이 안도로 바뀌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은 잘 안 통했지만, 딱 봐도 이것저것 알려주려는 친절함이었다. 숙소에서 조금 쉬다 보니 후반부에 만난 젊은 청년 두 명도 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또 기회가 만들어졌다. 체크인 순서를 양보한 두 명의 외국인도 말을 걸어왔다. 내가 사진 정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건 것 같았다. 자신의 카메라도 보여주면서 꽤 긴 시간을 어버버 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어도 잘 못하는 나의 이야기를 참 잘 들어주는 걸 보니 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저녁을 먹기 위해 마트 Dia에 들렀다. 주방에 사람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일찍 먹으면 나만의 시간도 생기고 복잡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니 일본인 두 명이 있었다. 그들도 식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저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식사를 했다. 나는 하몽에 맥주나 한 잔 할 뿐이었다. 그렇게 아쉬운 하루가 또다시 끝나 버렸다.


이날 하루 종일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여전히 남들을 부러워한다는 생각 말이다.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삶인데 나는 무엇이 그렇게 타인의 모습과 행동들이 부러워하는지 잘 모르겠다. 가난이라는 늪에서 탈출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세상엔 가난해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환경이나 조건 따위가 삶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정하는 데 굳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나는 알고 있음에도 삶이 가지고 있는 그 진리를 자꾸 외면하고 싶다. 왜 나는 가지지 못할까. 왜 나는 할 수 없을까. 어릴 때도 하지 않던 그 모든 탓들이 지금에 와서야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와서도 그렇다. 자연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무엇하나. 자연의 뜻,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여기까지 온 나의 삶이 참으로 어려웠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지만, 때론 그게 내겐 독이 되나 보다. 턱밑까지 차오른 이 자격지심을 컥하는 소리와 함께 힘껏 뱉고 싶을 뿐이다. 며칠 남지 않은 그곳에선 난 이 역함을 과연 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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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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