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춘기는 없었다. 이야기하자면 길다. 편모 가정이었고, 무척이나 가난했으며, 집에 우환은 끊이질 않았고, 다소 강압적인 엄마와 늘 도움을 받으며 살아온 스스로에게 내린 자격지심이라는 형벌까지. 그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의 많은 일들이 내 앞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는 인생을 구멍을 메우며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멍이 적거나, 아니면 크기가 작다. 그래서 그 구멍을 잘 메우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구멍을 메우기가 쉽지 않았다. 하나를 메우면 저기서 구멍이 생기고, 여기를 메우면 저쪽 구멍이 커지는 이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러니 인생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아무튼 도움을 많이 준 사람들의 기대도 있었고, 스스로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아이처럼 살았다. 사춘기 때 누구나 한다는 지랄을 해 본 적이 없다. 나한테는 그것은 사치였고, 시간 낭비였다. 어른들은 철이 빨리 들었다고 칭찬을 해주었지만, 나중에 커서 보니 그것은 욕이었다.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짓을 하고 넘어가는 게 성장의 중요한 부분인데, 나는 그것을 오롯이 마음속에 쌓아두었으니,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제 그 시기가 중요한데, 속된 말로 또라이짓도 용납되는 시기가 분명히 있다. 만약 그 짓이 스무 살이 넘어 서른 살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터진다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게 분명하다. 결국 나는 사춘기를 20대에 겪었다. 그것도 대학에 들어가면서. 억압 속에서 살았던 청소년기에서 해방되면서부터 자유를 가지게 된 나는 무서움이라는 게 없었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고, 나의 지랄이 무슨 사회면에 나올 것도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엄청난 비행이자 반역이었다.
사실 ‘나잇값’이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필요한 덕목은 맞다. 알 만한 나이에 알아야 하고, 가져야 할 나이에 가져야 하는 사회통념적인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딱히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나이를 책임의 양이라고도 하던데, 그렇기엔 억울한 사람도 상당히 존재할 게 뻔하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제 그 정도 나이되었으면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나의 지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질량보존의 법칙’이라고 물리학에서 나오는 아주 중요하고 기본적인 법칙처럼, 인생도 여러 법칙을 따른다. 그중에 하나가 ‘지랄총량의 법칙’이다. 평생 동안 지랄할 양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10대 때 하지 않으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게 된다. 사춘기를 겪는 게 부모나 자식에게도 정말 힘든 일이지만, 내가 평생에 할 지랄을 그때 다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쁘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20대, 30대 아니 40대에 넘어가서 지랄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낭만도 때가 있다.
필자의 성격은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기운이 많이 빠졌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나의 총량도 어느 정도 다 끝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억만금을 주어도 돌아가기 싫었던 10대였지만, 지금은 돌아가고 싶다. 숨 한 모금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며 살았던 지옥 같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당당히 반역을 꾀하고 싶다. 그랬다면, 20대의 나는 좀 덜 방황하고, 좀 덜 불안에 떨었을 것이고, 좀 더 빨리 길을 찾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의 나는 10대 보다 20대가 더 행복했고, 20대 보다 30대가 더 행복하다. 이제 40대를 바라보면서 30대 보다 더 행복한 10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제 할 지랄은 다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