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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 Mar 10. 2024

죽고 싶었던 아토피

 어머님의 선 넘으시는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너무 미웠다. 그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차곡차곡 마음속에 쌓아두었다. 자꾸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면서 감정의 덩어리를 키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나쁜 사람’이라고 자책을 했다. ‘나도 아들을 키우는데 나 같은 며느리를 만나면 어떨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얼마나 후회할까?’, ‘슬퍼하는 남편을 무슨 면목으로 볼까?’ 싶었다.

 이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혼으로 친정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릴 수도 없었다. 그냥 땅으로 푹 꺼져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어머님이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나의 감정들을 억눌렀다.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던 나는 남편만 볶아 댔다. 남편도 중간에서 괴롭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나의 행동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참아지지가 않았다. 불쌍한 자기 엄마 이해 좀 해주면 안 되냐는 남편과 싸우게 됐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낀 그날, 나의 선택은 틀렸고 이 결혼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절망감으로 나 자신을 놔버렸다. 3일 동안 고열이 났다. 그 후 나의 얼굴과 온몸은 아토피로 덮여버렸다. 화가 나를 집어삼켜버린 것만 같았다. 밤에는 가려워서 살 수가 없고, 낮에는 아파서 살 수가 없었다. 괴물처럼 변해버린 나는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1살, 3살 된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마음을 착하게 쓰지 않아서 하늘의 벌을 받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고집을 보게 되었다. 나는 나만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살아왔다. 내 생각이 옳다는 집착이 강했다. 겉으로는 “네~ 네~” 하면서 마음으로는 어머님을 심판하고 있었다. 

 아토피는 자가 면역질환이다. 외부의 세포와 바이러스를 공격해야 하는 나의 면역세포들이 오류를 일으켜 나 자신을 공격하는 병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미워함으로써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서 생긴 병인 셈이다.     


 어머님은 친정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셨다. 어머님은 장애가 있는 아버님과 결혼을 하셨다. 어머님은 그런 아버님을 도와주고 싶으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평생 시집살이를 하셨다. 그분의 고된 삶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머님이 가여웠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대하셨지만 사실은 버림받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사랑받고 싶으시다는 표현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 역시도 어머님에 대한 미움 이면에 어머님께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나의 감정이 풀리자 아토피였던 나의 몸도 자연스럽게 나았다.


 어머님을 통해 나는 ‘사랑과 용서’라는 큰 깨우침을 얻었다. 용서는 사랑의 완성이고, 진정한 자기 사랑이다. 어머님은 아픔을 통해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셨다.

 그 후 나는 상대를 미워하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시작하는 순간 다른 수준의 세상으로 떨어지게 되고, 내 마음은 지옥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불행도 역할이 있어서 온다고 한다. 시련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면 시련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진다. 내가 풀지 못한 문제가 있으면 다시 풀어야 하도록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다. 문제의 열쇠는 나에게 있다.

 작은 사건들을 겪을 때 충분히 느껴서 풀어주지 않으면 점점 더 감정의 덩어리가 커지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은 나쁜 거라고 생각해서 회피하거나 없는 척하고 억눌러 버리면 나중에 더 큰 사건을 맞게 된다. 관계에 있어서 마찰이 생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한 방향으로 풀려가는 것이다. 곪아 있던 게 터져 나올 땐 아프지만 상처는 결국 깨끗이 아문다. 내 상처가 아물어야 다른 사람의 상처도 보듬어 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 이유는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사랑의 이면에는 미움이 존재한다. 기쁨의 이면에는 슬픔이 존재한다. 두 가지 감정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야 짝이 되는 긍정적인 감정도 느낄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눌러 버리면 그것과 짝이 되는 긍정적인 감정도 같이 억눌려 못 느끼게 된다. 

 아픔을 주는 상대방은 그 걸 느끼게 도와주는 메신저이다. 그 사람은 인생게임에서 그냥 그 역할을 맡은 것뿐이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아닌 나를 봐야 한다.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 느껴줘야 한다.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알아차려야 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우리가 머리로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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