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서울 안암동에 있는 K대학교 근처 대로변을 걷다가 최루탄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었다. 최루탄 연기가 눈에 들어갔는지 눈이 매웠다. 시간이 지나서 진정되었지만 맵고 뿌연 최루탄 연기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89년, 대학가 근처는 학원민주화 집회를 위해 모인 학우들과 이들을 저지하려는 전경(전투경찰)들을 때때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전경들 주위에는 청바지 차림의 건장한 남자 청년들이 함께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백골단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손에 각목 같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청색 상의와 하의를 입었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시위 진압을 위해서 전경들과 백골단은 함께 다녔다.
서울에 위치한 H대학교 본교에서는 학우들의 데모가 잦았다. 학교에는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총학생회장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가끔씩 학교 노천극장에서 운동권 학우들이 집회를 한 후 전경들이 교내까지 출입했었다는 소문이 들리곤 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계절학기(Summer school)를 수강했다. 계절학기는 본교에서만 개강했는데 D, D+, F 학점을 받은 학우들이 평점을 올리거나 학점을 취득하기 위해 수강하는 경우가 많았다. 1학년 때 영어과목 성적이 F 학점이었는데 학점을 취득하기 위해 본교에서 계절학기를 수강했다.
학교는 운동권 학우들의 시위로 인해 잠잠하지 않았다. 학교 정문이나 후문에는 전경들이 서 있었다. 학우들은 학교에 출입할 때마다 그들에게 학생증을 보여주고 출입했다. 학교는 평지만 있는 H대학교 분교와 분위기가 달랐다. 나지막한 산 위에 건물들이 있는 느낌이랄까. 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경사진 도로를 걸어가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에 학교에 갔다. 그날은 계절학기 강의를 들으러 간 것이 아니었다. UBF(University Bible Fellowship)라는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하는 일대일 성경공부모임 때문에 갔다. UBF는 대학교 기독교 동아리로 알고 있었지만 일요일에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적극적으로 대학생 전도활동을 했기 때문에 동아리 차원을 넘어서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UBF에서 목자님이 전하는 성경공부 모임을 마치고 혼자서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UBF는 성경말씀을 전하는 리더를 목자라고 불렀다. 모임을 마치고 나올 때 UBF에서 성경공부하는 것이 부담되어 싫었고 더 이상 참석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백팩을 오른쪽 어깨에 맨 채 대로변을 걷고 있었다.
"이리 와 봐"
그때였다. 갑자기 앞에서 누군가 나타나 내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순간 어렴풋이 보았는데 청색 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백골단 청년이었다. 백골단 뒤에는 전경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그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했다. 내 몸은 대로변을 벗어나 차도로 향했다. 내가 차도에 쓰러지자 그는 다시 내 몸을 일으키며 대로변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손은 내 오른쪽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을 잡아당겼고 백팩을 잡았다. 그때 내 오른팔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정신없이 지하철역 방향으로 뛰어갔다. 뒤돌아보니 백골단과 전경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백골단에게 빼앗긴 백팩은 아무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주황색 가방이었고 그 안에는 성경책만 들어있었다. 운이 없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UBF애 가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가방까지 빼앗겼으니 말이다.
귀가해서 부모님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내 바지의 무릎 부분이 찢어져 있었고 무릎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다. 낮에 백골단이 내 오른팔을 잡아당길 때 빠져나오려다가 넘어져서 다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상처를 보더니 농담조로 웃으면서 백골단에게 테러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도 백골단은 내가 복장을 수수하게 차려입고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고 있어서 운동권 학생으로 의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가방을 뒤져 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방 속에는 의심할 만한 것 없이 성경책 한 권만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