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물으려다 해방이 있는 쪽을 물었다|
아홉 번째 즈음 방문했을 때
의사는 더 이상 기본적인 인사조차
선뜻 건네지 않았다
뿔테 안경 너머의 가느다란 시선
보이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일관되게 무마하려는
방법이 없을까요, 선생님
얼마나 드셨어요
두 알째서 게워냈어요
이번 약은 뒷맛이 너무 써요, 선생님
낫자고 먹는 건데 너무 고통스럽잖아요
쓴맛은 약의 효능과는 무관하지 않나요
제 친구가요, 최근에 아기를 낳았어요
요즘은 애도 안 아프게 낳을 수 있잖아요
무통 주사가, 잘 든대요......
원래 해산은 고통의 행위인 거 아세요
그게, 고통을 낳는 일이거든요
그, 성경에, 보시면은......
그런데 이제는 안 아프대요
행복만 딱 낳는 거예요
생명이 태어나는 행복만
하물며 출산도요, 선생님
그런데 약 하나 먹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
의사는 말없이 키보드만 두드렸다
더 강력하고 이로운, 그래서 아마도 해로울
약을 처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 말은요, 선생님......
효능만 취할 순 없는 건가요
애쓰고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 말고
깔끔하게 괜찮아지기만 할 순 없는 건가요
보란 듯이 엔터키를 요란히 누른 의사가
마침내 나를 건너다본다
그 약의 뒷맛이 쓰다는 건
약을 삼킨 다음에야 느낄 수 있는 일이에요
그 약이 효과가 있다는 건
처방받은 약을 다 먹은 다음에야 알 수 있고요
그렇다면 그것까지 포함된 부산물이라고 봐야겠죠
무슨 의사가 그래요
그 약의 성분을 뻔히 알면서
주절주절 늘어놓은 내 이야기만 듣고
내 뇌 사진이나 몇 번 찍어보고
다 아는 척 그 약을 쥐어주고선
미리 알 수 있는 건 없다고요
아픔을 뚝 잘라낼 순 없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애초에 안 아프게 하는 약은 없나요
엄마 뱃속에서 출발하자마자
그 태초의 행복이 영영 부식되지 않게
챙겨 먹을 만한 약은 없나요, 선생님
의사가 처방전을 내민다
갓 인쇄되어 열감이 남아있는 종잇장
지난 여덟 번과 똑같은 이름들이
닭장 속의 달걀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다
우리는 늘 알면서도 아프죠
안경을 고쳐 쓴다
지나치게 말을 아낀다고 생각했다
다음 방문 때 할 말이 없을까 봐서일지 모른다
내가 또 오면 그는 괴로울까
내가 또 오지 않으면 후련할까
애초에 아픈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의 상태는 행복에 가까웠을까
눅눅한 약봉지를 들고 돌아온다
하루 세 번 식후 섭취
약을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
약을 토해내면 밥도 토해내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열 번째에는
기약이 없는 치유에 대해 푸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