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다니엘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무한도전 시절 이적님과 유재석 님이 젊은 시절 꿈과 좌절 그리고 말한 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 관한 노래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비평준화 고등학교를 다녔었고 매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 시절 꿈은 막연한 in 서울의 대학이었다.
수능이 끝난 후 점수가 나오기 전 일부 유명대학들이 견학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교를 홍보했고 나는 수원의 경희대 캠퍼스 견학을 가게 되었다.
그 해 우정원이라는 기숙사가 처음 지어졌고 딱딱하고 칙칙한 기숙사의 느낌이 아닌 '남자 셋 여자 셋' '논스톱'에 나오는 캠퍼스 라이프의 모습과 똑 닮은 기숙사에 반해 버렸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왠지 이 학교에 가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른 몇몇의 학교 견학에서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다른 학교에 대한 미련이나 망설임 없이 지원해서 합격했다.
남중, 남고 그리고 비평준화 교육으로 억압받아 왔던, 그리고 '대학 가면 하고 싶은 거 다해'라고 설득당해왔던 열아홉 살의 나는, 대학에 왔으니 그동안 모르던 많은 것들을 경험 해보리라는 부푼 마음뿐이었다.
내가 선택한 생명과학부라는 곳이 정확하게 어떤 것을 공부하고 어떤 진로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학 입학 후, 가장 해보고 싶었던 언더그라운드 공연을 보기 위해 나는 무작정 홍대로 갔고
드럭, 프리버드 등을 찾아가 크라잉넛, 레이지본, 노브레인 등 당시 CD플레이어로만 듣던 그 음악의 현장감과 분위기는 촌놈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그때의 홍대 분위기, 그곳의 사람들, 그들의 옷차림 등을 생각하면 설레고 소름 돋는다. 그리고 지금 나의 행동, 생각, 모습들이 더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주류지만 그때는 노래 취급도 못 받았던 힙합 음악을 접한 시기도 그때쯤으로 기억한다.
학교 축제 때 기숙사 침대에 누워 친구들과의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숙사 앞의 가까운 무대에서는 낯선 전주와 함께 어떤 남자의 랩이 시작됐다 '어 이거 뭐지?'
그 시절 현진영, 서태지, 듀스, HOT 같은 랩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는 라임과 플로우가 뭔지도 모르던 그때조차도 굉장한 충격을 받을 만큼 신선한 음악이라 느꼈던 것 같다.
음악이 끝난 후 그들은 다소 과장된 껄렁껄렁한 동작과 목소리로 자기를 '드렁큰 타이거'라고 소개했고 그들과 그 신기한 음악이 좋아질 것 같았다.
대학 동아리가 뭔지 잘 모르던 시절 학부에 친한 친구가 가입한 동아리에 쫓아 가 그냥 멋모르고 들어갔고 동아리는 당구, 농구, 게임방 그리고 술로 이어지는 매일의 반복이었다.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없었고, 나는 그런 대학 동아리의 굉장히 특이한 놈이 되어 있었다.
그냥 나른한 날의 반복으로 한 학기가 훌쩍 지났고 우연히 남자화장실의 불법 신장매매 찌라시 같은 전단지에 '힙합동아리 멤버 모집'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상상과 기대감에 어떤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발은 이미 그곳을 향하게 되었다.
I 성향의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그곳에서 인생의 친구와, 추억을 모두 얻었다.
충격적인 눈을 가린 노란 머리, 귀찌를 콧구멍에 걸고 헤드스핀을 돌고 있던 덩치, 우탱클랜의 WU웨어 청바지를 알려준 잘생긴 날라리가 기억나는 첫인상이었고, 그들과 23년째 잘 지내고 있고 관 뚜껑 닫을 때까지 잘 지내지 않을까 싶다.
친구들은 다양한 전공과 취미 그리고 스타일들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 4명은 '서로 다름'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 친구들의 같은걸 다르게 보는 시선은 단순했던 내 시선에 다양성을 주었고, 지금도 고민이나 일이 막 혀 답답할 때 그들을 만나면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시야와 욕을 동시에 선사하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20대 초 우리는 매일같이 밤새 놀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나름 힙했고 제법 놀 줄 알았던 것 같다.
군대를 가야 할 때쯤 '나중에 우리는 뭐하고 살고 있을까?'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힙합 음악이 대중적이었다면 우리는 계속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돈도, 잘생김도, 그렇다고 뛰어난 실력을 가지지도 않은 그냥 음악을 좋아하는 아마추어였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둘씩 군대에 다녀왔고, 다시 모였을 때는 그래도 철이 좀 든 건지 함께 보다는 각자의 삶이라는 것이 더 많이 생겼다.
구멍 났던 학점을 채우고 취업준비를 해야 했고 남들처럼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평범한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학교 생활에 충실해지던 때,
학교 앞 서점 안에 작을 카페를 좋아하게 되었다. 도서관의 답답한 책상과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는 나를 금방 질리게 하고, 잠들게 했기 때문에, 카페 스피커의 드릴 듯 말듯한 재즈 음악과 불편하지만 편한 테이블과 의자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좋았고 힙해 보였던 것 같다. (물론 공부보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았었고, 난 그게 좋았던 것 같다.)
현실적인 '나중에 뭐가 하고 싶니?'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대답들이 나오기 시작했던 20대 중반
그 카페에서 자주 공부와 인생 얘기를 했던 여사친은(친구들 중 가장 현실적이고 담담했던)
얼마의 학점을 받으면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고, 그 이후 얼마의 연봉이 되면, 어떤 차를 사서 타고, 어떤 직업과 연봉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할 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 질문이 되돌아왔을 때 나는 구체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런 나도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정말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카페는 은퇴한 노부부가 운영하셨는데, 커피를 참 좋아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사를 친근하게 받아주실 때쯤, 왜 먹는지 모를 만큼 썼던 에스프레소도 주시면서 커피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친근하게 해 주셨고, 그 카페는 그냥 혼자도 갈 수 있는 편한 곳이 되었다.
그곳에서 함께 공부하던 여사친이 다시 나에게 뭘 하고 싶냐고 물었고, 찰나에 내 눈앞에는 그 노부부가 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난 그냥 이런 작은 내 카페를 하고 싶어, 전공이 식품이니까'라고 말을 해 버렸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았고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 그 말을 향해 흘러왔다.
'흘러왔다' 가장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많은 노력을 했을 거고,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알게 모르게 내가 말했던 '작은 내 카페를 하고 싶어'에 다가가기 위한 선택을 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작은 카페가 하고 싶다' 보다는 큰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곳은 스타벅스 그리고 나는 음료 개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