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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Jan 23. 2023

[단미가] #19. 마음의 '운동장'

단어의 의미가 가슴으로 다가올 때 #19

마음의 '운동장'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과 항성과 행성, 그 외에 무수한 물질들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주는 그 수많은 존재들이 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이 비어있다고 한다. 그 텅 빈 부분은 우리 조상들이 강조하던 여백의 미일까? 뭔가 거창한 말이겠지만, 사실 요즘 글을 쓰지 못하고 뭔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우주의 텅 빈 그 부분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음의 '공허'가 찾아와서이지 않을까?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꿈은 이러하다.

으레 꿈은 이유도 알 수도 없이 뜬금없이 한 장면부터 시작한다. 내 자신이 꿈의 전부를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다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매번 같은 장면으로 종종거리는 '내'가 있다. 그러다 무언가에 쫓기고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다 어떤 한 장소에 놓인다. 막다른 길에 빠진 나 자신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다가옴에 몸에는 경련이 일어난다. 깜짝 놀란 나는 식은땀에 온몸이 축축해진다.


그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꿈을 꾸지 않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무섭고 두려운 현실을 회피하고자 하는 꿈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평소에 9시에서 10시면 잠에 들었던 예전의 '나'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당연히 일을 하면서도 실수가 잦아지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또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하루가 간다. 


초임지에는 학교 옆 언덕에 우거진 나무가 흐드러지게 무성한 잎을 내어 있었고, 알록달록한 아기자기한 꽃들이 화단에 있었고, 그 무엇보다도 과거의 연이를 지켜주던 소중한 이들이 있었다. 짧게는 1년 3개월, 길게는 2년마다 옮겼던 학교에 그런 좋은 환경과 사람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말 그대로 정글이었고, 무인도였다. 의지할 사람도 그런 마음을 나눈 이들도 없는 그냥 직장이었다. 애초에 그런 곳은 무릉도원처럼 존재할 수 없는 곳이었을 수도 있었다.


나약하고 심약한 연이는 탄자니아 북서부에 위치한 세렝게티와 같은 이곳에서 최하위 초식동물이나 다름없었다. 뭔가 힘들고 지칠 때 차석주무관님은 담배를 피우러 가고, 시설주무관님은 술을 먹으러 가고, 실무사님은 달달한 커피를 먹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그들은 대체재를 찾았다는 것을. 


연이는 마음에 상처를 잘 받았다. 그것도 참 많이. 연약하기 짝이 없이 말이다. 정년퇴직이 목표인데, 그게 참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걷고 또 걸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몸을 움직였다. 마음이 뚫린 것처럼 바람이 슁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아렸다. 연이의 강점이 마음의 미세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온전히 느끼는 것인데, 이럴 때는 참 무뎠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걷고 걷다가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앉았다. 바람은 찼지만, 햇살을 받을 수 있어서 나름 나쁘지 않았다. 손은 시려서 후리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작은 물체를 만져졌다. 두 눈을 감았다. 


5월의 따스한 햇살이 큰나무 아래 벤치로 한들한들 내리고 있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빛을 굴절시켜 햇살을 타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은 매서운 한파가 뿜어내는 지난겨울의 한기가 아닌 따뜻함을 품은 공기로 연이의 얼굴을 스치고 있었다. 황량한 이곳에 마음의 운동장을 옮긴 듯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마음속으로 들어올 때는 따뜻한 5월의 공기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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