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류》에 나타나는 사랑과 상처
‘급류’, 물이 빠른 속도로 흐르는 것을 이르는 말이자 어떤 현상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 이를 제목으로 하는 정대건의 소설 《급류》는 이름처럼 거센 삶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이들의 이야기이다. 본작은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안인 동시에 상처를 되새기는 존재가 되는 역설적인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 관계의 주인공인 도담과 해솔은 어느 날, 각각 급류의 피해자이자 급류에 가담한 가해자가 되어 부모를 잃었다. 본작은 급류 이후 몸만 성장하고 마음은 과거에 살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용돌이에 빠진 그들이 허우적대다 소용돌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상처와 위안, 그리고 사랑을 통해 그려 낸다.
도담과 해솔은 늦은 밤 계곡에서 부모들의 바람을 목격한다. 해솔의 부름으로 놀란 해솔의 엄마가 급류에 휩쓸려 두 부모는 자식을 떠나게 된다. 도담과 해솔은 하나의 사고로 인해 부모를 잃고 평화롭던 삶을 잃으며, 첫사랑이었던 서로를 잃는다. 서로 의지하고 지내던 두 사람은 사고 이후 해솔의 이사로 만나지 못하나 성인이 된 후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둘은 만나지 못한 사이에 많이 달라져 있다. 해솔은 죄책감이 들수록 매사 계획적이고 착실하게 살고, 도담은 죄책감이 들 때마다 술을 마신다. 이후 둘은 급류처럼 휘몰아치는 사랑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사랑이 둘의 상처를 덧나게 만든다. 해솔은 도담을 이해하지 못하나 화 한 번 내지 못한다. 사고가 본인의 잘못이라 생각하여 그녀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마음을 아는 도담은 해솔에게 더욱 함부로, 못되게 군다. 이는 해솔의 죄책감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녀 또한 그 사고의 피해자이며 여전히 고통받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도담의 방식이다. 그러나 도담이 해솔에게 뱉는 비수 같은 말은 도리어 그녀 자신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
서로에게 위안과 상처가 되기를 반복하던 때 도담의 엄마, 미영이 둘의 만남을 알게 되어 반대한다. 두 사람은 미영의 반대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결국 헤어지게 된다. 헤어진 이후 둘은 30대를 맞이하며 각자 나름의 안정기를 찾기 시작한다. 도담은 본인의 몸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해솔은 죄책감을 다른 이를 구하는 사명감으로 풀어낼 수 있게 된다. 도담의 아빠처럼 소방관이 되어서 말이다.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된 해솔의 사고 소식. 도담이 이를 보고 먼저 다가갈 용기를 가져 둘은 병원에서 재회한다. 소용돌이에서 비로소 벗어날 준비가 된 그들은 피하기만 했던 그날의 이야기를 나눈다. 이를 통해 둘은 서로를 용서하고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제 진정한 상처의 치유는 새로운 삶의 몫이다.
연인이던 시기, 도담과 해솔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만든 것은 서로를 보며 느끼는 동질감과 연대감이었다. 그것들은 그들에게 위안이 됨과 동시에 짐이 되었고 그들을 구속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급류에 휩쓸렸던 그날을 잊지 못해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단지 그날을 치유하기 위한 무언가인지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 도담과 해솔은 아이러니하게 같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었다. 아니, 같은 상처를 입었기에 가해자가 되었다. 미영의 반대가 아니었어도 둘의 이별은 예정된 일이었을 것이다. 급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는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으니. 그 급류를 벗어나기 위한 해답은 도담과 해솔에게 가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 함께 계곡의 물을 바라보며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너 소용돌이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어떻게 해야 되는데?”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돼.”
두 사람이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겁이 나 벗어나려고 치던 발버둥을 멈추고 잠수할 준비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버둥이 아닌 깊은 잠수를 통해 급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급류로부터 도망치는 게 답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깊게 받아들이고 들여다보며 때를 기다리는 게 답이었다. 둘의 사랑은 작중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도담은 해솔에게 가까이 가 닿고 싶었다. 그때 조류에 밀려나 두 사람이 멀어졌다. 둘은 물결을 가로질러 서로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해솔과 도담은 손을 뻗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그들은 사랑하며 여러 번의 조류를 겪었고 그럴 때마다 흔들리기 바빴다.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강해진 것은 아니다. 아직 그들은 연약하기 그지없고 또다시 급류에 휩쓸리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연약했던 두 사람은 이제 수많은 혼란 끝에 거센 물살과 같은 시간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알아냈기에.
본작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이자 동시에 상처를 되새기는 존재가 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일반적으로는 같은 사건을 겪은 피해자들은 같은 상처를 공유하기에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럴 수 있다. 그 아픔을 아는 것은 같은 상황을 공유한 이들뿐이기에. 사고의 유가족들이 함께 뭉치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이다. 도담과 해솔도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두 사람의 마찰을 목격하며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이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게 된다. 정말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 마주할 때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든 기억을 계속 상기하게 되는 것 아닐까. 계속 마주해야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런 상대로 하여금 상처를 계속 마주하게 하는 것이 정말 유일한 방법인가. 고통을 공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서로에게 상처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자극이 된다. 과거의 트라우마는 현재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고통의 공유가 위안이 아닌, 상처의 덧남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 간의 만남은 치유만을 의미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무뎌질 때까지 상처를 마주하고 극복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회피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처는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 반응과 같이 상처는 일상에서 신체적 혹은 정신적 증상으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벗어나기 위해 잊기를 택했지만, 어떤 방법보다 강력하게 구속되게 된다. 잊거나 외면하는 것은 소용돌이 속 발버둥과 같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론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반대로, 마주하는 것은 잠수와 같다. 처음엔 숨이 막혀 오고 어둡기 만한 상황에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물에 빠진 것이 아닌 자의로 숨을 참고 있는 순간부터 급류 따위는 구속이 아니다. 구속에서 벗어나야 탈출할 수 있다. 잠수는 전진을 위한 후퇴와 같아 소용돌이를 벗어날 준비를 마치게 한다. 그렇기에 최선은 상처가 고통스럽더라도 무뎌질 만큼 마주하는 것이다.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끝없이 마주하는 것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끝없는 고통에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극복은 고통의 연속 끝에 존재한다.
우리는 연약하다. 어떤 급류에도 담담해질 만큼 강하지 않다. 하지만 그 급류를 벗어나는 방법을 알 수는 있다. 우리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과 함께하며 연대하고 손을 잡아 소용돌이 밖으로 나아간다. 잠수하는 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어 두려운 마음을 함께 달랜다. 그 길을 혼자도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함께라면 보다 더 잠수할 용기가 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우린 같은 상처를 받은 이들과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