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혼모노>
진짜, 본뜨거나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참된 것. 가짜,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민 것. 두 단어는 성해나의 작품, 소설 <혼모노> 속에서 등을 붙인 채 대조되고 있지만, 때로는 그 경계가 모호해지며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마주하게 만든다. <혼모노>는 신빨이 다 떨어진 무당 문수의 점집 앞으로 신애기가 이사 오며 생긴 변화를 담았다. 단순히 새로운 무당이 이사 온 것이 아니다. 신애기는 원래 문수가 모시던 할멈이 넘어간 무당이다. 그로 인해 문수는 신빨을 잃었다고 생각하기에 그녀와 할멈이 함께 있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심란할 수밖에 없다. 무당에게 신빨을 잃는다는 것은 돈줄이 끊김과 같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다시 할멈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이전보다 더 열심히 상과 기도를 올리지만, 할멈은 돌아오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대답도 없다. 결국 할멈이 없는 상태로 굿을 진행하였던 문수. 굿을 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칼로 신이 들어왔음을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신이 없는 문수는 상처가 나기 일쑤였고 이는 신이 없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었기에, 문수는 스스로에게 신이 없음을 인정하고 만다. 결국 그는 신이 없음을 숨기기 위해 작두 모형을 구하며 가짜를 자처한다. 진짜를 흉내 내기를 선택한 것이다. 본고는 문수라는 인물이 어떻게 ‘가짜'를 선택하고 그 가짜를 포기할 때 비로소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지를 통해 재능과 노력의 차이가 만드는 패배감과 인정의 중요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신애기와 할멈은 그런 문수를 보고 ‘니세모노(僞物)’, 즉 가짜라고 칭한다. 이를 기점으로 문수는 자신이 가짜 무당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때 가짜와 반대되는 진짜의 인물은 신애기다. 문수는 신이 있는 척 흉내 낼뿐이지만, 신애기에게는 신이 있기 때문이다. 신과 교류하는 무당 신애기와 신과 교류하는 척하는 문수는 대조되는 진짜와 가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로 나뉜 것은 할멈이 옮겨갔기 때문이 아니다. 문수가 가짜가 된 것은 흉내 내기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신이 옮겨가기 전 문수는 진짜라고 칭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와 진짜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요소는 신인가? 이는 아니다. 문수가 이전에 진짜였던 이유는 거짓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진짜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진짜였다고 해서 신애기와 같았느냐 물어본다면 이 또한 아니다. 문수는 신이 있을 당시, 진짜였을 때도 신애기와는 사뭇 달랐다.
신애기와 문수의 차이는 소설의 시작부터 나타난다. 신애기는 소설의 시작에서 햄버거와 너겟을 먹으며 등장한다. 동시에 할멈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존에 할멈을 모시던 문수가 언급한다. 그녀는 할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30년여 동안 고기도 못 먹던 문수와 달랐다. 둘이 다르다는 근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할멈과 신애기, 그들은 기질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는 다르게. 나는 할멈을 모시고 받들었는데, 저것은 할멈과 동등하다.” 이때 문수는 깨달았다. 신애기와 자신은 다르다는 것. 이것은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것과 새롭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신애기에게는 그와 다른 무언가의 차이가 존재했고 그것이 둘의 상황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둘의 차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문수의 말을 읽고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두 무당의 시작은 사뭇 달랐다. 문수는 노력으로 신을 모셨고 신애기는 재능으로 신과 교감했다. 시작부터 두 사람은 재능의 차이가 있었다. 이는 문수가 절대적으로 무능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무능하다. 이를 알게 되면 의문이 생긴다. 문수는 신을 잃지 않았더라도, 재능의 차이가 느껴지는 신애기를 보고 가짜를 자처하지 않았을까? 돈을 벌기 위해, 신애기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또 흉내를 내고 가짜가 되지 않았을까? 문수는 신을 잃지 않았어도 진짜를 포기하고 가짜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을 가짜로 만드는 것은 참된 것과 아닌 것의 구분이 아니라, 진짜 속에서도 나타나는 차이, 진짜끼리도 존재하는 재능과 노력의 차이가 만드는 패배감이다. 이 패배감은 개인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결국 ‘흉내 내기'라는 가짜의 길로 이끌며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진짜인 이도 한순간에 가짜를 선택할 수 있다. 진짜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차이로 인해 진짜를 포기하고 가짜를 선택할 수 있기에 두 개념의 거리는 가까울 수밖에 없다.
신의 유무가 진짜를 결정하는 요인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신을 잃은 직후에는 가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작두 모형을 구하며 진짜를 흉내 내려고 했을 때를 기점으로 그는 가짜가 되었다. 그는 신이 있던 이전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가짜로 흉내 내면서라도 살아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문수는 할멈과 신애기가 함께 그를 보고 키득대었을 때, 둘의 동등함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짜는 아무리 노력해도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가짜로 사는 것을 선택했기에 진짜를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를 깨달은 문수는 마지막 굿을 통해 가짜를 포기했다. 흉내 내기를 포기하고 가짜를 포기하기를 선택하였을 때 비로소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진짜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본작에서 문수는 노력, 신애기는 재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는 노력보다는 재능이 높게 취급받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사회 속 재능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오죽하면 책상에 오래 앉아있는 노력도 재능이 된다고 한다. 오래 앉아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오래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효율을 내는 것이 재능이라고 말한다. 노력을 재능으로 취급하며 한 번 꺾고 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갖고 오며 또다시 꺾는다. 왜 노력은 노력 자체로 재능을 꺾을 수 없는가. 왜 노력이 재능이 되어야 또 다른 재능을 능가할 수 있는가. 이는 사람들이 노력을 인정하기 위해 노력을 재능으로 취급하려고 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만든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포기하는 이도 있고 그 인식에도 불구하고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 노력 또한 문수가 겪은 것처럼 부정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기도 한다. 같은 노력에도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현실에 좌절하기도 하고 가짜가 되어 진짜라고 생각하는 이를 흉내 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가짜는 흉내 내는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포기한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짜를 포기한다는 것은 부족한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과 같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할 때 진정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이는 씁쓸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열등감과 같은 못난 감정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인정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부족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나아갈 수 있다. 부족하다고 해서 가짜가 아니다. 부족함을 숨기기 위해 흉내 낼 때 가짜가 된다. 이는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결국에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진짜로도 존재하기 어렵게 된다.
<혼모노>는 무속신앙이라는 소재를 통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신과 기질이 잘 맞는다는 재능과 그렇지 않은 노력을 통해 선명하게 우리에게 재능과 노력의 차이를 보여준다. 우린 이를 통해 우리 무속신앙을 넘어서 우리 사회 속 재능과 노력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 본인은 본작을 통해 사회 안에서 재능에 비해 무시당하는 노력의 모습을 보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기 위해 또다시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을 문수에 비추어 봤다. 그는 무당으로서의 가짜를 포기하고 자기 자신으로서의 진짜를 선택했다. 더 이상 거짓으로 흉내 내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를 보며 부족한 자신을 깨달은 후에 가짜가 아닌 나 자신으로서, 진짜로서 나아가야 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쉴 새 없이 남들과 비교되는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는 더더욱 필요하다. 두려움, 오기 등의 감정으로 가짜를 택할 수는 있지만 결국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가짜는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미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가짜가 아니다. 꾸밈이 없이 인정하고 드러내는데 어떻게 가짜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가짜를 포기할 때 비로소 또 다른 진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