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만들어 낸 메마른 미래

<위플래쉬> 속 집착과 광기

by DR

최고를 위한 대가는 무엇인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 <위플래쉬>는 이 질문에 대한 강렬한 답변을 제시하며, 성공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욕망의 어두운 단면을 파헤친다. <위플래쉬>는 재즈 드러머 앤드류와 그의 폭력적인 멘토 플레처 교수의 관계를 통해 성공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드럼 연주가 돋보이는 음악 영화이지만, 단순히 음악 영화를 넘어 인간의 욕망과 광기가 어떻게 한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심도 있게 담아낸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인 앤드류와 플레처의 감정선이 눈에 띄는데, 필자는 앤드류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플레처와의 관계 속에서 폭발하는, 성공에 대한 집착에 주목하고자 한다.


영화 초반, 앤드류는 드러머로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평범한 학생으로 보인다. 인정받는 음악단의 지휘자이자 교수인 플레처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기뻐하는 모습은 그가 가진 순수한 열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플레처는 앤드류의 재능을 알아보는 동시에, 가학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를 교육하기 시작한다. 끊임없는 욕설, 모욕, 그리고 물리적인 학대까지 방법을 가리지 않는 플레처는 앤드류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붙이며 위대한 연주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재능이 아닌 광기라는 사고방식을 주입한다. 이런 플레처의 교육은 ‘버림’을 전제한다. 메인 드러머는 단 한 명이고 연주를 해내지 못하면 언제든지 버려지는 상황이 앤드류를 더욱 궁지로 내몬다. 이러한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은 앤드류의 내면에 깊이 박혀 성공에 대한 집착을 부추기는 심리적 약점으로 작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앤드류가 이런 플레처의 학대를 묵묵히 견디며 오히려 더욱 연습에 매달린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 역시 플레처의 광기 어린 성공관에 동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쩌면 앤드류 본인도 처음부터 그런 성공관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앤드류는 빠른 속도로 플레처의 폭력성을 내면화한다. 플레처의 언행에 눈물 흘렸던 그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독기를 품고 연습에 임한다. 플레처가 원하는 연주를 완벽히 해내고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손에 피를 뚝뚝 떨어뜨릴 정도로 자기 파괴적으로 연습에 집착하게 된다. 그 자기 파괴적인 행동은 메인 연주자 자리를 뺏길 위기에 처하자 더욱 심해지며 결국 앤드류는 사고를 당했음에도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까지 경연장에 가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앤드류가 성공을 향해 나아갈수록 그가 잃어가는 것들을 명확히 보여준다. 여자친구 니콜과의 관계는 그의 연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파국을 맞이하고, 가족과의 소통도 단절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자신마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 기억에서 지워진 채 90살까지 사느니 서른넷에 술에 찌들고 파산해 죽더라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하는 게 나아요.”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이 성공에 대한 집착과 광기로 번졌고 오직 드럼과 성공만이 그의 삶의 전부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앤드류는 점차 인간적인 공감 능력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상실하고, 오직 자신의 목표만을 향해 돌진하는 기계적인 존재로 변모한다. 결국 경연 직전 교통사고의 상처로 인해 경연을 망치고 앤드류는 플레처의 팀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음악을 그만둔 그는 다시 만난 플레처의 제안으로 무대에 오른다. 자신의 가학적인 교육에 대해 인터뷰를 한 앤드류에게 악감정이 있던 플레처는 일부러 틀린 악보를 알려준다. 그의 복수로 앤드류는 오히려 각성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앤드류가 플레처의 혹독한 훈련으로 인해 음악을 그만두게 되었음에도 그 이후로는 플레처에 대한 애정도 증오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경연에서 플레처에게 폭언을 쏟아붓던 모습과는 상반되게 말이다.


이는 앤드류가 애초에 플레처에게 ‘애증’의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앤드류가 집착한 건 플레처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집착한 것은 앤드류가 플레처에게 부여한 ‘그에게 인정받음을 통한 드러머로서의 성공’이다. 그가 플레처를 증오한 것은 플레처가 자신의 성공을 부정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을 그만둔 앤드류에게 드러머로서의 성공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플레처 또한 가치가 없다. 플레처에 대한 앤드류의 감정은 플레처라는 ‘인간'을 향한 애정이나 증오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무엇이 앤드류로 하여금 연습에 과하게 집착하게 만들었냐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플레처의 인정으로만 보이지만, 플레처의 인정은 앤드류에게 ‘성공의 증표’와 같은 의미였다. 성공을 보증해 주는 존재인 플래처에게 외면당하는 일은, 실패할 것이라는 앤드류 내면의 불안을 자극했다. 앤드류가 연습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완벽을 추구하며, 그의 목표는 완벽주의자인 플레처 교수를 만족시키는 일이다. 앤드류는 플레처의 폭력적인 훈육을 견디며 매번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고통을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이는 플레처에게 인정받으려 버티는 것이라기보다는 플레처의 만족이 앤드류 본인이 느끼는 한계이기에 그것을 뛰어넘으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가깝다. 앤드류가 플레처로 인해 음악을 그만두며 플레처에게 휘둘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내재된 욕망을 폭발시키는 일종의 ‘각성제’와 같은 도구였다.


앤드류에게 ‘다시 함께 하자’는 플레처의 말은 ‘성공에 다시 도전하자’는 말과 같은 것이다. 앤드류가 다시 무대에 돌아가서 떠올린 플레처의 말은 “여기서 실패하면 그 업계에서 실패한다.”는 냉혹한 한마디이다. 그는 인정받거나 플레처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대에 다시 오른 것이 아니라, 다시금 성공을 꿈꾸기 위해 무대에 다시 오른 것이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는 앤드류와 플레처의 마지막 연주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기형적인 관계의 정점을 보여준다. 오직 복수와 완벽한 연주만을 갈망하는 앤드류는 광기 어린 집착이 만들어 낸 일종의 ‘환희’에 빠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환희는 과연 진정한 예술적 성취일까, 아니면 성공이라는 허상에 매몰된 무모한 몸부림일까? 환희를 느꼈을지언정, 그 순간부터 그는 슬프고 공허한 빈 껍데기 인간이 되어 버린다. 이 환희는 외적인 성공의 쾌감일 뿐, 내면의 행복이나 인간적인 성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앤드류를 바라보는 플레처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여기며 기뻐한다. 반면 앤드류의 아버지는 다르다. 그는 아들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표정이 굳는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앤드류는 성공하지만 30세의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을 것이다. 그가 원했던 성공이 정말 이런 것일까. 불행한 결말을 맞더라도 자신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많은 삶. 이것이 예술가로서의 성공인 것일까. 영화는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관객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위플래쉬>는 성공이라는 달콤한 유혹이 인간을 얼마나 쉽게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강력하게 경고한다. 가학적인 교육 풍조가 누군가에게 빠른 성장을 가져올 수는 있으나 이로 인해 앤드류와 같은 비극을 맞는 이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 <위플래쉬>는 현대 사회의 가학적인 교육 풍조에 대한 비판이자, 과정의 중요성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경쟁 사회의 병폐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의 메시지이다. 결국 <위플래쉬>는 성공을 향한 집착이 때로는 예술을 넘어 인간성마저 집어삼키는 치명적인 광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진정한 성공의 의미와 인간성이라는 가치를 다시금 되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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