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경주
바람골, 서당골, 앞골, 큰골, 뒷골, 소매골, 호박골, 감나무골, 배나무골, 메주골, 새갓비알골, 황새골,미륵골, 탑골, 부처골, 웃밭골, 부엉골...
남산에는 40여개의 계곡이 있는데 유적이 없는 계곡은 서너개 밖에 없다하니 가히 노천박물관이란 이름에 값을 하는 산이다.
그 중에서 절골, 부처골, 탑골, 미륵골은 남산의 북쪽 끝에서 우리 동네까지 이어지는 뒷산 골짜기들 이름이다. 부처골에는 숨어있지만 인기가 높은 ‘감실여래좌상’이 있다, 탑골에는 옥룡암과 부처바위가 있다. 미륵골에는 남산에서 제일 큰 규모의 절, 보리사와 통일신라 후반의 석불을 대표하는 보물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신라의 궁성이었던 반월성에서 들어오면 양지마을, 음지마을을 지나 갯마을이 나온다. 보리사가 있는 미륵골 아래 갯마을이 우리 동네다.
경주 남산 불국토 아래 마을답게 스토리가 있음직한 정겨운 이름들이다.
겨울철에 가장 추운 곳이 이불속이라고 누가 말했는지 뜻밖에 따스한 해를 지고 동네 마실을 나간다. 골목 끝에는 아직도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 오두막이 한 채 있다. 지금은 좀 생뚱맞은 하얀 레이스 대문을 달아둔 집이다.
그 자리에는 낮고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마루는 손바닥만하고 방은 손수건만했다.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은 5만원짜리 지폐만하지 않았나 싶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구불구불하고 어설픈 나무로 지은 주먹만한 흙집이 걸작이었다. 세상의 모든 작고 낡은 집을 다 가지고 싶은 나는 자주 기웃거리며 좋아했다.
조립식 패널집을 새로 지은 주인은 작은 마당에 상추도 두 세포기 심고, 대파도 묻어놓고, 갖가지 꽃도 가꾸면서 정들어 산다. 옛집은 흔적도 없는데 아무 상관없는 나만 소용없는 아쉬움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겨울이라 마을의 집들도 기름기 빠진 사람처럼 부스스하다.
나는 옥룡암 가는 휘어진 개울길을 유독 애정한다. 한 발자욱 내려서면 개울물에 손이 닿는 만만한 흙길이 귀하고 귀하다. 자본과 편리의 힘이 언제 이 길을 덮어버릴까 조바심하며 살가운 길을 아끼며 걷는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절집 마당에 선다. 해탈교, 속세와 불계를 가르는 경계 앞에서 두손 모아 합장을 한다. 여염집에 들어갈 때의 노크같은 양해라고나 할까? 무언의 허락을 해주신 산문주인 부처님께 드리는 감사라고나 할까? 남의 공간에 들어서는 송구함이라 할까? 이런 사소한 마음을 챙길 때 내가 내 안에 있다.
옥룡암은 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에 새로 지어졌다. 부처바위, '탑곡마애조상군'으로 유명하다. 부처바위는 거대한 바위 4면에 30여개의 도상을 새겨놓은 바위그림이다. 여래상, 비천상, 보살상, 나한상, 탑, 사자... 숨은 그림찾기처럼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바위의 오른쪽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넓고 평평한 공터가 나타난다. 한 쪽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바위면에는 감실안에 여래상과 친근한 모습의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여래상 앞에는 얼굴이 많이 훼손된 여래입상이 서있다.
겨울철 마을 아이들이 나무하러 다닐 때 여기 공터에서 모여 갔다고 한다.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삼존불 바위 앞에 불을 지펴 종일 릴레이로 불을 쬐었다고 한다. 가운데 부처의 돌색갈이 붉은 이유는 그때 불길의 흔적이라고 마을의 어른은 말씀하신다. 문화해설사들은 채색이라 설명한다면서 코웃음을 치는데 그 말이 맞을 것 같이 들린다. 해마다 겨울 내내 바위 앞에서 불을 피웠으니 그 열기에 바위인들 견딜 수 있었을까? 어설픈 지식보다 경험이 설득력있다.
옥룡암은 이육사와 인연을 가진 절집이기도 하다. 육사는 독립투사로 저항시인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감시를 피해다녔다. 고승들과 친분이 두터워 사찰에 숨어들어 요사채에 머물었다. 그의 대표작 시 '청포도’는 이즈음 옥룡암에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작고한 경주의 한 어른이 당시 곤궁에 처한 육사에게 돈과 생필품을 전달하라는 부친의 심부름으로 옥룡암에 들렀다. 그 때 육사는 ‘청포도’ 원고를 앞에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옥룡암은 이육사와 한국문학에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이다.
그의 수필 `산사`도 이 때 쓰여졌으며 글에 나오는 대상들이 당연히 경주이었을 것이고, 옥룡암이었을 것으로 본다. 본명이 이원록인 이육사는 형과 아우 3형제가 독립운동울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다. 이 때 수인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으며 마흔의 나이로 북경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옥룡암에는 이육사 뿐만 아니라 추사의 흔적도 있다.
법당 옆 요사채 방문 위에‘一爐香閣(일로향각)’이라는 추사체 글씨 현판이 걸려있다.
통도사의 노전에 걸려있는 편액과 똑 같다. 사람들은 추사가 직접 써준 글씨는 아니고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복제한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또 현판 뒤쪽 방문 위에는‘祖備六竹世識一色(조비육죽세식일색)’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 또한 얼핏 보아도 추사의 글씨로 보인다. ‘조사스님이 6개의 대나무로 세상의 돌아가는 모습을 알았다’로 해석하는 육조혜능선사의 비명의 일부라고 한다.
대구 팔공산에 있는 은해사에도 추사의 글씨가 많이 남아있어 추사의 보고라 불린다. 경상감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일대를 여행하면서 은해사에도 왔다고 한다. 은해사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 노전의‘일로향각’백흥암의 산해숭심’...추사의 글씨를 찾아 겨울 은해사에 다녀오고 싶다.
추사도 육사도 가고 없다. 석공도 사라졌지만 영혼으로 남긴 글과 그림은 후세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옥룡암은 노천 미술관이 되어 관심과 발길을 모은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짧은 생의 봄날에 나는 여전히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브런치 바구니를 들고 옥룡암 숲길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