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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희숙 Aug 26. 2021

나만 아는 경주

검은 구름 가득한날 황룡사지에 서보라

 교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다. 자리에 앉아 문득 눈이 부셔 고개를 들어보면 바다 수면에 반사된 햇빛이 바로 내 눈에 쏘이는 순간이었다햇빛의 입사각과 반사각 그 끝점에 내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그때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하늘에 짙은 구름이 낮게 차면 그제야 바다의 넓이가 가늠이 되었다. 그릇에 담긴 물의 양으로 그릇의 크기를 짐작하듯이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양이 바다의 크기였다.

 2만 5천 평 황량한 대지, 황룡사터에도 검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한 날 비로소 그 아득함을 실감한다.


경주를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불국사석굴암대릉원황룡사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폐사지라면 단연 황룡사터가 일 순위가 아닐까 싶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에 시작하여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새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 절을 지었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고승들과 기도를 올리는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다. 그 후 자장이 탑을 세울 것을 청하여 645년에 9층 목탑을 완공하였다. 탑은 벼락에 불타 중수를 거듭하다가, 1238년(고종 25년)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소실되었다.

 기록에는 탑의 높이 80m, 부처의 진신사리 100과, 금과 철의 무게 3만 5,007근, 황금이 1만 198분의 장륙 존상,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더 큰 종, 4만 점이 넘는 유물... 최대 최상을 강조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이 엄청난 수치는 역사적 기록일 뿐 상상조차 버겁다남아있어 확인되는 절터의 초석과 줄 맞춘 64개의 목탑터 초석들중앙의 심초석... 무심한 돌들만 발길을 끌어당겨 말을 붙인다서서 서성거리지 말고 돌방석에 앉아 햇빛의 온기를 담아가라고 발바닥을 간질인다눈감고 바람이 들려주는 지나간 수많은 영욕을 가만가만 들어보란다영원한 것만 좋은 것일까흥망성쇠도 나쁘지 않다. 모든 존재는 생로병사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  사라진 여백과 공허도 쓸쓸해서 아름답지 않은가여기 폐사지가 주는 텅 빈 충만침묵으로 설하는 고요를 평화로이 누려보라! 속삭이던 바람도 어느새 저만치 흩어진다.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온 적이 있다 마침 꿈꾸어오던 수학여행을 기획할 기회가 있었다. ‘신라 사람들이란 전문 해설 단체에 유적답사를 맡겼다그때는 학교 여행에서 비용을 따로 지불하는 전문 해설사를 의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신라 사람들’에서는 몇 가지 코스를 제안해오고 그중에서 황룡사지가 들어있는 일정을 택했다. 황룡사지를 안내하는 그들의 관점은 거대한 물리적 규모나 수치에 있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의 불교 사상과 호국정신을 중심에 둔 문화와 예술을 알기 쉽게 안내해주었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나직한 목소리에 여행에 들떠 무질서하던 무리들이 순해져 있다. 나도 그 대열 속에 앉아 귀담아들으며 소름 끼치는 감화를 받았다. 


 9층 목탑지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씩 초석에 앉혔다. 눈을 감고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이 들리는지 가만히 느껴보라고 했다그들은 아이들의 꿈을 불러 계단 오르듯 정상으로 데려갔다부푼 꿈이 함성이 되어 빈터를 채울 때 아이들은 모두 김유신이고 문무대왕이고 선덕여왕이었다이곳에 올 때마다 바람에 실려오는 그때 아이들의 벅찬 함성을 듣는다.


 황룡사탑 복원추진위원회가 2005년에 결성되고 2000억 원이 넘는 예산으로 2034년에 복원이 완성되는 계획이 확정되었다. 2016년에는 국민적 공감대와 고증연구를 위한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개관되었다문화재 복원에 대한 찬반은 견해가 엇갈리는 문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복원에 대해 부정적이다더구나 9층 목탑의 정확한 구조에 대한 고증자료가 없다고 하니 복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계획대로 조성이 되면 그 탑은 21세기에 만든 새로운 탑일 뿐 원형은 아니다. 억지스러운 시간의 되감기는 또 다른 파괴가 될 것이다.


 비어서 가득한 곳, 폐사지의 공허와 충만이 허물어질까 걱정스럽다. 유형의 것을 능가하는 무형이 있지 않을까.

 그저 검은 구름이 하늘 가득한 날, 코스코스 꽃무리가 흔들리는 황량한 빈터에 서있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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