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긴 어딜 가요. 여기 툇마루에서 짜장면 시켜 먹읍시다.”
주말에 가끔 놀러오는 후배들에게 점심으로 어디 가서 뭘 먹을까냐고 물었더니 준비했다는 듯이 바로 하는 대답이었다.
“정말?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다. '논두렁 짜장면'에서 '툇마루 짜장면'으로 변신하겠네”
논두렁 짜장면은 해마다 보문호에서 개최하는 '경주세계차문화축제날' 먹는 특식이다. 거기에 찻자리 하나를 맡은 내가 도와준 다동(茶童)들과 찾아온 지인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베푸는 특별 연회이다. 논두렁 짜장면이 태어난지도 5년이 지났다. 첫 해에 부산에서 내방해준 지인들에게 경주에 아주 특별한 레스토랑이 생겼으니 기다렸다가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차축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진다. 준비한 차가 소진되었거나 타지에서 온 차인(茶人)들의 부스들은 이미 철수를 했지만 정한 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가 뒷정리를 하는데 마음이 바빴다.
노을이 지기 전에 그 레스토랑까지 갈려면 서둘러야한다. 가을철에는 해가 짧아 10여분의 시간도 금방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통일전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내 차를 선두로 승용차 5대가 줄을 이어 달린다. 뒤따라오는 지인들은 그 부근에 새로 생긴 식당이 있는가보다 하고 목적지에서 내린다. 아직 멀었다고 들판을 앞서 들어가니 모두 멈칫멈칫 의아해 한다. 탁트인 너른 들판에는 이미 남산의 발치부터 산그늘이 내리고 있었다. 노을이 피크일 시간의 들판은 노란 살구색으로 익은 벼의 색갈에 복숭아빛 노을을 얹어 색상환에도 없는 제색을 날마다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낸다. 하루가 다르게 익어가는 벼의 색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조화로 만들어지는 오묘한 색의 세계이다, 이 마법에 든 화가들이 인상주의가 아닐까? 빛이 사라지면 색의 세상도 검은색 밤이 되니 마음이 바쁘다.
우리 동네 앞 들판은 요즘 보기 드문 순수 벼논들만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농촌에도 비닐하우스나 공장 창고 등이 없는 들판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경주의 숨은 볼거리는 이 들판이 압권이라 생각하면서 아낄 뿐 아니라 나의 탐미안을 우쭐해한다. 이른 봄에 모내기 준비로 쟁기질해서 뒤집어 놓은 논바닥의 쟁기 무늬부터 물을 담아둔 무논의 면분할 구성은 일년 농사의 시작이자 대지예술의 밑그림이다. 이어서 모를 낸 어린 연두색 모가 땅 냄새를 맡으면서 검푸른 녹색이 되면 어느 새 벼는 어른 무릎만큼 차올라 우북해진다. 햇살이 따가와지는 7월이 되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벼에서 나락냄새가 난다. 8월에는 엄마가 이불 꿰매다가 뽑아논 실밥같은 나락꽃이 피고 벼줄기가 통통해지면서 알을 밴다. 사람들이 덥다고 햇빛을 피해 그늘에서 베짱이 노릇을 하는 동안 벼는 온몸으로 햇살을 받아 결실을 준비한다. 여린 벼가 다닥다닥 맺고 익어가면서 들판이 다시 연두색이 되어지면 9월이다.가을이 눈앞이란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을 해거름에 걸으면 남산의 짙은 소나무 숲은 실루엣만 남아 이철수의 판화가 된다. 가끔 초승달이 산꼭대기에 머리삔으로 꽂혀 있다.
이렇게 하루도 아까운 들판을 소유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아침에 먹거리를 주섬주섬 바구니에 담아 들국화 휘늘어진 둑길 그늘에서 브런치를 먹거나, 다 된 밥을 넉넉히 담고 찌개를 냄비째 차에 실어가 논두렁에서 달빛으로 저녁을 먹는다. 때맞추어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스페셜 쿠폰으로 베푸는 나만의 이벤트이다. 이런 은밀하고도 귀한 일들은 언제나 아끼고 싶기도 하고, 자랑하며 공유하고 싶기도 한 갈등을 조장한다. 이 때 공개와 비공개의 심사 기준은 전적으로 나의 특권이다. 아무래도 가장 큰 비중은 공감력에 있는 것 같다. 깊이 느끼지 않는 사람은 귀한 줄 모르고 떠벌이기만 한다. 달빛이 그득하게 술렁이는 들판에서 혹여 달그락 거리는 그릇 소리에도 고요가 깨어질까 조심하는 이를 초대하고 싶은 곳이다.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는 그 밤이 아깝고 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람이 최우선이다. 그 상황에 아무것도 보탠 것이 없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부리는 교만인지는 나도 모른다.
둑길에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넓은 공터를 미리 답사해두었다. 농사용 자동차들이 교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공간이다. 차를 멈추고 여기서 황금 들판과 남산의 노을을 보러왔다고 시치미를 떼려는데 철가방 오트바이가 둑길로 부르르 들어온다. 모인 사람들이 그제사 탄성을 지르면서 속았다느니, 그럴 줄 알았다느니, 당신 답다느니 하며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깜짝 속은 억울함,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실망감, 뜻밖의 이벤트에 유쾌함 등이 싫지 않은 반응들이다. 돗자리를 펴고 각자 자리를 잡는 사이에 벌써 어두워졌다. 눈앞에 턱까지 차오른 금빛을 괴고 세상에 없는 저녁을 먹고 싶었는데 들판이 어둠에 잠식되는 것이 아쉬웠다.
내맘대로 짜장면 반, 짬뽕 반으로 주문했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넓은 홀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흙바닥에 앉아 음식을 받들어 먹는 초유의 경건한 특식이 아니겠는가? 그 다음해에는 일년만에 하는 주문인데도 식당에서 그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배달 장소를 자세히 설명하려는데 "작년에 거기요?" 한다. 배달했던 곳이 하도 특이해서 잊혀지지 않았나보다.
자동차 두 대를 마주 세워 라이트를 켰다. 불빛에 길섶의 풀이 반짝이며 흔들린다.
이렇게 탄생한 논두렁 짜장면에 이어 후배들의 제안으로 올 봄에는 툇마루 짜장면이 태어났다.
5월은 역시 계절의 여왕이다. 뜰에 있는 온갖 초화류가 꽃을 피운다. 무심히 버려두었던 잡초조차 저 혼자 시절을 챙겨 꽃을 달고 씨앗을 만든다. 기둥에 붙여놓은 줄기식물들도 무성하다. 붉은 인동, 백화등, 개나리 자스민, 양귀비꽃, 사계국, 찔레꽃, 두메 달맞이....뜰 가득 붉고 노란 꽃들이 피어나고 향기가 울안에 가득하다. 이런 뜰을 두고 밖에서 방황하는 실수를 저지를뻔 했다.
중국집에 음식을 주문할 때 빠질 수 없는 추가 메뉴는 탕수육이 아닐까? 네 사람이 짜장면 3,탕수육 1을 주문했다. 배달될 때 빠지지 않는 군만두가 따라 왔다. 모처럼 아무도 부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한갓진 식사였다. 이 탁월한 발상은 올봄 씨즌 메뉴가 되어 툇마루 짜장면을 핑게로 마음 놓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면발에 김이 피어오르는 까만 짜장면 앞에서 우리들의 행복도 곱배기로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