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그릇을 쓰나요?
오래 집을 비웠다가 귀가했다.
인기척 없어 썰렁한 집안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작은 화병에 꽂아놓았던 민트 한줄기가 새잎이 나고 꽃도 몇송이 새로 피어있다
물도 다 말랐을텐데 처음 꽂았을 때보다 새 잎을 더 많이 달고 있다.
병바닥에 촉촉한 습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새로 난 잔뿌리들이 화병의 바닥과 옆구리를 파고들 것처럼 밀착되어있다.
세상에 처음 나온 신생아가 눈을 감고도 엄마의 젖냄새로 품을 찾아드는 것처럼 흙을 찾아 파고드는 식물의 본능이 대견하고도 미덥다.
지난 석가탄신일에는 밤늦게서야 불국사에 갔다. 종일 아무 생각이 없다가 해질 무렵에야 문득 등불 밝힌 나라 최고의 가람 대웅전을 상상하며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백야행 탑돌이도 끝나고 신도들도 모두 돌아간 대웅전 비탈길이 조용하다.
도량에 들어서는데 관리인이 설법전부터 차례로 불을 끄며 대웅전 연등도 내린다.
아쉽게 돌아나와 백운교 청운교에 설치된 장엄한 연등을 바라보며 내려왔다.
계단 아래 아기 부처 관욕대 자리에 미처 치우지못한 거베라가 흩어져있다.
긴 꽃자루 끝에 단색으로 피는 조화같은 꽃이라 좋아하지 않지만 아직 싱싱하다. 거룩한 날 가피를 입은 꽃이란 생각에 그냥 버려지기에는 왠지 불경스러워 두손 가득 챙겨왔다.
워낙 단순한 꽃이라 한송이씩 꽂아 눈가는 공간마다 두니 그런대로 실내에 표정이 생긴다.
두 세달쯤 지나 잊고 있었던 화병을 쓸일이 생겨 찾았다.
어머나!!!! 꽃잎은 쪼그라져 떨어지고 겨우 몇잎 초라하게 붙어있다. 동전만하던 수술 부분만 소복히 피어올라 원래 꽃크기만하게 부풀어있다.
바닥에는 서로 힘겨루며 피어올랐다가 떨어진 민들레 홀씨같은 수술 하나하나가 완전한 씨앗의 형태로 수북하게 떨어져있다.
땅에서 자란 꽃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어도 이렇게 완벽한 한살이를 살아냈을까? 흙보다 대지의 기운이 강한 것이 도자기인가? 아무리 감탄을 해도 시원치않고, 놀라운 생명의 조화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천기누설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꽃이 지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피어남이다, 순환의 연결 고리이다.
수십년 전에 키우던 소사나무 분재 화분이 하나 관리부실로 죽었던 일이 생각났다.
줄기에 말라붙은 잎을 손으로 뜯어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순환이 끊어진 나무는 봄이 없어 잎을 그대로 달고 있었던 것이다. 낙엽도 생명의 한 과정 속에 있어야 볼 수 있는 현상이란 깨달음이 오늘 다시 증폭되는 날이다. 가까이에 두었던 유리병에 꽂힌 꽃은 병목부분에 곰팡이가 피어 목을 떨구고 처져있었다. 의도치 않았던 비교대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건드리기도 조심스러웠다. 깃털같이 가벼운 홀씨들이 화병 둘레에 수북하기도 하고, 하늘과 맞닿은 성스러운 교신에 훼방꾼이 되는 것 같아 화병을 옮길 수도 없었다.
‘신비’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거베라의 꽃말이라는데 나는 수수께끼의 답뿐 아니라 우주의 신비를 한 송이 꽃으로 본 것 같아 환희와 겸손으로 벅찼다.
내가 부처님을 믿는 불자였다면 석가탄신일의 가피를 입은 증거라고 꾸역꾸역 우겨댔겠지만 아직은 물신론자이다.
이 또한 사진으로 도공부부에게 보내며 흥분했으나 그들은 반응이 멀뚱하다. ‘우리가 백번쯤 말했거든요?’ 이런 생각이었을까?
“먹던 김치라도 도자기 그릇에 담아두면 신맛이 나지 않는다. 야채를 씻어 도자기에 담아두면 다시 살아난다. 과일을 담아두면 오래 동안 싱싱하게 먹을 수 있다. 무엇이든 도자기 그릇에 찌면 재료의 색이 그대로다...”
많이 들었지만 아는 것이 생활화되는데도 전생애가 걸리는 것 같다.
나도 거베라꽃처럼 물이 담긴 도자기 그릇 안에 서 있을 수는 없지만 한잔의 물이라도 어느 그릇으로 마셔야 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그들의 도자기 첫 구매자로 맺은 인연이 20년이 넘었다. 그들은 아직도 나를 첫 손님으로 각별히 대우하고, 나는 진짜 사람인 그들을 만나 진짜 그릇으로 밥먹고 물 마시는 웰비잉으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평소 자기들의 그릇이 무해하니 안심하고 쓰라고 늘 말하지만 이렇게 증거를 확인하니 새삼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신비스러운 진짜의 가치를 만방에 자랑하고 싶어 거실 테이블에 올려두고 누가 올 때마다 먼저 감격해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