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명.재(3)-친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적은 계속 는다.
가족이나 친척과 같이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거나 법적으로 공인된(이를 깨려면 호적에서 제외되거나 이혼 같은 경우정도니) 선천적인 인간관계를 제외하면 살아가면서 사귀거나 만나는 후천적인 인간관계는 친구와 적이라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친밀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 친구라 하기는 그렇지만 그렇다 해서 적대감이나 불편함 또한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어서 적이라고 부르기 힘든 경우인 흔히 지인이라고 일컫어지는 사람조차도 전체적으로 보면 친구에 가깝거나 적에 가깝거나라고 나는 인식하고 있다. 사람은 양면적인 존재로 어떤 때는 친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어떤 때는 적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그 사람에 대해 평가할 때는 친구의 이미지거나 적의 이미지 둘 중 하나가 더 먼저 생각날 때가 많은 것 같다. 설령 그 사람이 정말 극단적인 양면을 가진 사람이더라도 말이다.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사람은 어찌됐든 무언가에 대하여 이미지나 인식되는 것이 확실한 것을 선호하지 불확실하며 애매한 것을 선호하지 않는 것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인간관계에서 친구와 적은 정말 중요하며 확실하게 나뉠수 있는 부류라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명언을 해석하면서 알아가보자.
토마스 존스는 영국의 유명한 공무원이자 교육가이며 1870년 9월 27일 출생, 1955년 10월 15일에 타계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6인 중 한 명,웨일스의 왕,천 개의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친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적은 계속 는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해석하면 친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정도로 계속 생겼다 사라졌다 반복하지만 적은 계속 늘 정도로 많아진다라는 뜻이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친구를 만드는 것보다 적이 만들어지는 것이 더 쉬운 것을 의미하며 적이 만들어지는 것이 어렵다라는 것의 의미도 되지만 친구를 깊게 사귀는 것 또한 힘든 것을 의미힌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없는 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나 신뢰 같은 것이 엄청나게 깊고 두터운 것보단 형식적이며 간단한 관계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술했듯이 인간관계를 크게 나누자면 친구와 적으로 나눌수 있으며, 이는 100%의 친구의 모습만 보이거나 100% 적의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닌 설령 친구와 적의 면모를 동시에 보이더라도 완전히 50% 친구,50% 적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설령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는 친구의 이미지가 더 크거나 반대로 적의 이미지가 더 강하거나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명언 속으로 들어가서 "친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적은 계속 는다"를 대입해보자. 이는 좋은 관계보다 나쁜 관계가 오래 지속 될수록 더 늘어난다는 소리일 것이다.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설령 취미나 특기가 자신하고 완전히 일치하거나 성격이 자신하고 완전히 맞더라도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취미나 특기가 맞더라도 성격적으로 불화가 생기거나 성격적으로 맞더라도 취미와 특기가 그렇게 맞지 않는다면 그냥 지인정도이지 막 찾아가면서 사귀거나 사교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인간관계가 단순히 성격적인 부분이나 취미,특기적인 부분만 맞는다고 완성되는가? 환경적인 부분,더 나아가 직업과 관련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즉, 인간관계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며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최소한 그런 변수들이 인간관계에 치명타를 줄 수 없을 정도여야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짧게 짧게 맺는다면 모르겠지만 길게 맺는다면 그런 치명타를 단 한 번도 안 당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에 친구와 같은 좋은 관계는 있다가도 없을 수 있다. 그러면 없다가도 있는 경우는?
이건 생각해보면 너무 쉽다. 사람은 정말 극히 드문 경우나 드문 상황이 아닌 이상 인간관계를 맺으려는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이는 '메슬로의 욕구단계이론'의 3단계인 사회적 욕구에도 서술되어 있다. 즉, 생리적인 욕구나 안전에 관련된 욕구 다음으로 사회적 욕구를 강력한 동기의 욕구로 칠 정도로 중요시 여긴다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한테서 배우거나 그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맺으려고 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없다가도 있을려고 하며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행동한다. 이렇기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다는 것이다. 그럼 적은 왜 늘까? 이것도 앞에 있다가도 없는 경우를 보면 굉장히 쉽다. 아까 있다가도 없음을 설명할때 인간관계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며 그런 변수들이 치명타를 주느냐에 따라 좋은 관계, 나쁜 관계가 나뉘는데 짧은 인간관계를 제외하면 깊고 장기간의 인간관계를 가질수록 그런 치명타를 가질 확률 또한 높아지게 된다. 사람은 친밀도가 높아지고 오랫동안 볼수록 어느정도의 불만,불신 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완전히 그 사람을 믿으며 또 그 사람도 자신을 믿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관계는 나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각별한 사이가 아닌 이상 여러가지 이유(공부,일,연예 등등)으로 인간관계에서 소홀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 정신 차려서 그런 관계를 유지하려고만 하면 좋겠지만 사람이 바쁘면 인간관계를 뒷전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장기간 인간관계가 지속될수록 적은 계속 늘 수 밖에 없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지난번에 했던 것이 명언 그 자체를 넘어 외부적인(영화 촬영 기법)부분까지 신경을 써야해서 어려웠다면 이번에 한 명언은 순전히 재해석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외부적인 요인이 없이 내부적으로 명언 그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1~2편과는 달리 한 번에 글을 쓰지 못하고 2일에 걸쳐서 글을 썼다. 그렇기에 어느정도 생각이 바뀌거나 좀 더 정돈되어 썼다(나름대로). 사실 1~2편은 오래전부터 생각을 해왔던 것이지만 이번 3편은 글을 쓰기 며칠 전 갑자기 꽃혀서 작성한 것이라 생각이 엄청나게 정돈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끝으로 친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적은 계속 느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적을 안만들려고 인간관계를 짧게 혹은 조심해서 맺을까? 아니면 친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으니 사람을 대할때 사람 한 명 한 명 각각의 성격에 맞출까?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오랜 생각 끝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관계는 생각보다 엄청난 변수가 있고 그 변수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것 보다는 인정하지만 최소한 그 변수가 치명타를 가지는 것까지는 안가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노력해도 치명타를 맞을때가 있지만 그럴때 좌절하지 말고 설령 좌절하더라도 어느정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한채 해야 그래도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거나, 깨진 인간관계를 어느정도 복구할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인간관계가 깨지면 좌절할 때가 있다. 좌절에서 오래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머무는 것도 괜찮을거 같다. 좌절에게서 어느정도 쓴맛이나 아픔 등을 배우면서 이를 반복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만족스러운 결과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