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매

- 몽연경(夢緣境)

by 큰 숲

2.


다음날 서우는 서둘러 청수원으로 향해 늙은 한의사에게 물었다.


“제게 주셨던 그 약재, 이름이 뭔가요? 비늘처럼 빛나던데요.”


늙은 한의사는 조용히 대답했다.


“청매엽,.. 이 산, 저 안개 너머에서만 자랍니다.”


“안개 너머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 대신, 서우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 기억날지도 모르죠.”


늙은 한의사의 알 수 없는 말에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진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서우는 청색 부채를 허리에 차고 낯익은 산길을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안개는 그를 반기듯 출렁이며 길을 열어주었다, 이번엔 명확히 현실이었다.

한의원에서 돌아온 날 밤에도 꿈을 꾸었다.

하지만 전날처럼 선명하지는 않았다. 어딘가 어긋난 영상처럼, 꿈은 자꾸만 끊어지고 겹쳤다.

산을 오르던 길, 그 틈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얼굴. 누군지 모를 여인이었다.

그녀는 청색 비단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안갯속에서 살랑이며 나타난 그녀는 서우를 보며 무언가 말했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입술만 무성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얼굴이 흐려졌다.

마치 안개가 빨아들이듯, 그녀의 형체가 분해됐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하늘색 비늘이 박힌 청매엽 이였다.

서우는 화들짝 눈을 떴다. 입가엔 마른침이 말라붙어 있었고, 한약 냄새가 희미하게 방 안에 배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33분.


“…… 꿈이야.”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눈을 떠도 어딘가 낯설고, 감각이 둔했다. 이건 그냥 꿈이 아니다.

서우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부채가 있다. 어젯밤 꿈에서 주운 그 부채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우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다듬을 시간도 없이 청수원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밀었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개의 기운이 뒷덜미를 스치고 들어왔다.

할머니 한의사는 여전히 유건을 쓰고 약재를 손질하고 있었다.


“꿈을 꾸셨나 봅니다.”


단정적인 말투.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개념치 않는 듯한 모습의 진의원이었다.


“네. 그런데… 정말 꿈이 맞나요?”


서우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품에서 부채를 꺼냈다.

진 의원은 그 부채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그 부채는 오래전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결국, 당신이 꺼낸 거예요.”


“대체 이게 뭐예요? 저 새겨진 글자들, 제가 본 세계는…”


“모두 진실입니다.”


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전부를 받아들일 수 없겠죠.”


“청매엽, 그건…?”


“청매엽은 기억을 환기하는 약초입니다. 단순한 진정제가 아니에요. 몸이 아닌 영혼을 다스리는 약이죠.”


그녀가 검지를 들어 손짓하자 약재 서랍이 스스로 열리더니, 짙은 청록빛 잎 하나가 서우 눈앞에 둥실 떠올랐다. 지난밤 그가 삼켰던 바로 그것.

그녀의 손끝이 누군가의 과거를 더듬듯 잎맥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이 잎은 안개의 씨앗이에요. 누구나 삼킬 수는 있지만, 아무나 문을 볼 순 없어요. 당신은 반응했죠. ‘청매의 주인’만이 부채를 찾을 수 있고, 그 부채가 있어야만 그 문을 열 수 있어요.”


서우는 말없이 이끌리듯 청매엽을 잡았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잎은 은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곳은 어디죠?”


“지금의 이곳과 겹쳐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결. 옛사람들은 그곳을 ‘몽연경(夢然境)’이라 불렀어요. 이승과 저승, 기억과 망각의 틈. 그리고 청매의 주인은… 그 결의 균형을 다시 세울 사람입니다.”


서우는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기시감에 혼란스러웠지만 묘하게 끌렸다.


“ 제가… 왜 그런 걸 보죠? 제가..뭘 해야 하는 건가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아 손바닥 위에 작은 종이 부적 하나를 올려놓았다.

고서체로 새겨진 글씨가 부드럽게 빛났다.


—濁을 지나 靑을 따르라. (흐릴 탁) (푸를 청)



**

밤이 되자, 서우는 다시 약을 달였다.

이번에는 어제와 달랐다. 그가 마신 것은 단지 한약이 아니라, 청매엽 자체였다. 단순한 한약이 아닌, 청매엽 자체를 진하게 달인 탕. 잎은 마치 숨을 쉬는 듯 잔잔히 흔들렸고, 자신의 이름을 되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한 모금 넘긴 순간, 세상이 또 한 번 기울었다.

머릿속에서 안개가 터져나갔다. 산이 솟구쳤고, 땅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있었다.


<몽연경-夢緣境>

옥빛 하늘 아래, 구름과 안개가 춤추는 세계. 바람은 말을 했고, 땅은 기억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또 하나의 존재가 서 있었다.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사슴의 뿔을 단 소녀. 황금색 눈동자, 부드럽게 날리는 옥색 옷자락. 꿈에서 본 그녀였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 오셨군요. ”


“당신은 누구죠?”


“저는 호란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을 안내할 사람 정도로 해두죠.”


그녀가 손을 내밀자, 백색의 부채가 바람을 가르며 펴졌다.

문양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은 이제 열렸어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왜죠?”


“이 세계엔, 몽연경(夢緣境)을 열 수 있는 존재가 당신뿐인 건 아니거든요.”


그때—

하늘이 진동했다. 안개가 일렁였고, 낯선 그림자가 나무 사이를 스쳤다.

부채가 바람을 가르며 완전히 펼쳐졌고, 서우의 시야가 멀어졌다.

그가 겨우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느 절벽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절벽 위,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그의 손에도, 색은 다르지만 똑같은 부채가 들려 있었다.


“늦었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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