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사내
3.
" 늦었군. ”
그 남자의 눈동자는 바람보다도 차가웠다.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는 남자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날카롭게 떨어졌다. 검은 부채는 그의 손에서 천천히 펴졌고, 그 문양은 서우가 가진 부채와 기묘하게 맞물렸다.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당신은… 누구죠?”
서우의 목소리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웃음처럼 보이기도 하고 멸시처럼도 보이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몽연경의 주인은 하나. 그럼 너는… 뭘까?”
그가 손을 들어 부채를 펼치자 바람이 일었다. 땅이 흔들렸고, 하늘이 또 한 번 진동했다.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만둬!”
호란이 서우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전보다 더 선명하게 빛났다.
“여긴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균열을 일으키면…!”
검은사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세상은 조각조각 금이 가기 시작했고 땅이 갈라졌다. 안개가 뒤틀렸고, 공간이 쪼개지며 검은 틈이 생겨났다. 서우의 눈앞에서 하나의 세계가 열렸다.
**
그곳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희미한 빛이 감도는 숲속. 시간의 결이 찢긴 듯, 공기조차 금이 가 있었다.
서우는 무의식적으로 발을 디뎠다. 그의 뒤엔 호란이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여긴… 어디죠?”
“기억의 조각이에요. 당신과 닿아 있는 아주 깊은 기억. 청매가 당신에게 반응했다는 건, 그 기억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뜻이죠.”
“누구의 기억이죠?”
호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저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엔 한 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서우는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쩐지 낯익은, 하지만 지금껏 꺼내 본 적 없는 얼굴.
“… 나잖아.”
그가 허공에 뜬 멍한 눈동자로 읊조리자, 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자신의 기억입니다. 자기 자신을 마주해야만, 타인을 헤아릴 수 있거든요.”
아이의 곁으로 다가가자, 풍경이 일렁이며 변화했다.
비가 쏟아지던 골목. 깨진 접시, 쏟아진 한약재, 그리고 고요한 울음. 아이는 웅크리고 앉아 어른들의 말다툼을 듣고 있었다.
“이건… 이게 왜 다시 보이는 거지?… 이 장면은...”
서우의 몸이 떨렸다. 서우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자꾸 이런 세계가 펼쳐지는 거죠?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이런 곳에서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당신은 이 기억 위에 수많은 가면을 씌워왔죠. 하지만 이 결은, 당신이 외면한 진실로 열린 거예요.”
아이의 울음이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공간의 끝에서 무언가 어둡고 날카로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호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결을 파괴하려는 존재. 당신이 느끼는 공포에 반응한 그림자 같아요.”
순간 그림자는 서우를 향해 돌진했다.
본능적으로 그는 부채를 펼쳤다. 손끝이 짜릿하게 떨리며 청색 문양이 빛났다.
― 촤아악.
바람이 일었다. 그림자가 밀려났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서우의 부채가 스스로를 감쌌다. 청색의 결계가 그를 중심으로 둥글게 둘렀다. 서우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그 한마디와 함께, 서우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울던 아이는 서우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눈물이 고인 눈동자는 공포가 어려있었지만 안도하는 미세의 기대도 섞여 있었다.
서우는 그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안고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며 다독였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다 괜찮아져..”
그 순간, 모든 게 정지했다.
공간은 깨진 유리처럼 부서졌고, 안개는 다시 그들을 감싸며 원래의 몽연경으로 데려왔다.
**
서우는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호란은 혼란스러운 서우의 곁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잊었는지 기억하나요?”
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아니.. 아니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이게 뭐죠?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죠?.”
호란은 미소 지었다.
“그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이 당신을 이끌 거예요. 진짜 주인은, 피하지 않거든요.”
“집에 가봐야 겠어요, 지금 저는 좀 쉬어야 할 거 같네요.”
“그래요, 현실이 중요하죠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들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어요.”
호란은 혼란스러워 하는 서우가 조금은 진정되자 가지고 있던 하얀 부채를 탁- 하고 손으로 감싸 쥐었다.
순식간에 서우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