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수원 (靑水院)
1.
서울 외곽, 용두산 자락에 깊숙이 숨은 한의원 ‘청수원’.
도심의 소음에서 비껴난 이곳은 기이하리만큼 조용했다. 낮에도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때때로 산짐승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곤 했지만 사람들은 그저 신경 쇠약의 환각쯤으로 여겼다.
서우는 어릴 적부터 불면증과 불안장애를 앓아 왔다. 자라면서도 증상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수렁처럼 그를 끌어당겼다. 정신과를 수없이 오갔지만 명확한 병명도, 치료법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약은 점점 강해졌고, 자아는 점점 흐려졌다. 결국 치료는 포기 상태에 이르러, 무기력한 나날만이 반복되던 어느 날 노인들 사이에서 ‘용하다’는 한의원의 입소문이 돌았다.
서울 어귀, 산속 깊이 자리한 곳. 이름은 ‘청수원’. 워낙 으슥이 숨어 있어 주소조차 없었지만, 누구도 길을 찾지 못한 채 돌아오는 이는 없었다.
서우는 오래된 장화를 신고 용두산으로 향했다. 물기 머금은 낙엽이 바닥을 덮고 있었고, 산길 초입부터 옅은 안개가 발끝을 감쌌다. 점점 기온이 낮아지며 세상과 단절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서우는 안개 너머에 있는 청수원의 문을 열었다.
작은 현판에 흐릿하게 적힌 ‘靑水院’(청수원)의 세 글자. 삐걱대는 미닫이문 너머, 그곳은 마치 시간 밖에 존재하는 장소 같았다. 벽엔 고서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고, 시계조차 걸려있지 않아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묘하게 익숙한 분위기에 끌려 여기저기 둘러보던 중 칸칸이 나뉜 약재 서랍이 스르륵- 스스로 열리더니 안에 있던 약재들은 손질되어 다시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서우는 멍하니 보다 정신을 차리려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보니 서랍은 가지런히 닫혀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고서들이 풍겨내는 무거운 안정감과 약재의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 냄새는 익숙한 듯 안정감을 주면서도 알 수 없는 위화감을 풍겼다.
“처음 오셨네요.”
낡은 유건을 쓴 할머니 한의사가 나직하게 인사했다. 그녀의 눈매는 인자했지만, 그 안의 눈동자만큼은 또렷했다. 그녀는 서우의 눈동자에 초점을 맞추고 말했다.
“ 그간 편한 밤을 보내진 못하셨군요”
서우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서우를 대했다.
그날 서우는, 익숙하면서도 묘한 향이 퍼지는 갈색 한약 봉지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지고, 잠자리에 들기 전 조심스럽게 약을 달여 한 모금 마셨다.
달큼하면서도 입안에 맴도는 씁쓸함. 구기자, 감초, 숙지황… 익숙한 재료들이지만 그 마지막 잎사귀 하나가 낯설었다. 청록빛의 비늘 같은 잎, 솔잎과 비슷한 향을 가졌지만 솔향은 아닌 그보다 섬세하고 깊은 향이었다. 손끝에서 사르르 녹는 듯한 감촉을 가진 오묘한 약재였다.
그날 밤, 서우는 유난히 선명한 꿈을 꾸었다. 현실보다도 또렷한, 차가울 정도로 맑은 꿈.
그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허리께를 감싸는 안개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폐를 씻어내는 듯했다. 안개는 바람결에 흩날렸고,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어른어른 보이는 자연석 그 틈에 끼인 무언가가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오래된 부채였다. 자연석 사이에 꽂힌 부채. 바람결에 나부끼는 그 살엔 ‘靑’이라는 붓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서우는 이유도 모른 채, 본능처럼 그 부채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안개가 흩어지고, 발밑의 땅이 요동쳤다. 서우의 발 바로 앞 땅이 뒤틀리더니 발 밑의 땅이 머리위로 순식간에 휘리릭 돌았다 세상이 뒤집혔다. 그리고 곧바로 눈앞엔 낯선 세계가 펼쳐졌다.
푸른 하늘 대신 옥색 돔처럼 휘감긴 창공. 짙은 고산지대 특유의 낮고 무거운 기압이 가슴을 누르며, 고목들 사이로 은은한 빛줄기가 흘렀다. 그 틈을 가르며 봉황 같은 새가 날갯짓하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하늘 아래, 도포 자락을 흩날리며 삿갓을 쓴 사내가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계승자시여.”
그의 눈동자는 수직으로 갈라져 있어 조금은 기괴해 보였으나 안광은 또렷했고, 피부는 금빛 비늘이 솟아 빛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인간의 형상을 한 짐승, 혹은 다른 세계의 존재였다.
“당신은 누구죠? 여긴 어디고… 나는 왜…”
“모든 질문에는 한 가지 답이 있습니다.”
사내는 부채를 펼쳤다. 그 속엔 복잡한 문양과 고서체의 문장들이 쓰여 있었다.
“당신은 ‘청매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 청..매? 그게... 뭐죠? ”
“ 문을 여는 열쇠...”
부채의 문양은 살아 움직이듯 서우의 눈 속으로 흘러들었다. 머릿속을 파고들며,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무언가처럼 익숙하게 퍼져갔다. 의식이 흐려지며 그는 속삭였다.
“…이게 … 왜... 뭐지…?...”
쿠쿵-
물 병이 쓰러지며 큰 소리를 내자 서우는 놀라 잠에서 깼다.
눈을 떴을 때, 한약 봉지와 엎질러진 물, 그리고 이마에 차가운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 밤 다시, 그 안개를 뚫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꿈에서 본 그 부채가 서우의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현실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운 마음에도 그는 확신이 들었다.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