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자, 결국 스스로를 마주하다.
5.
***몽연경***
멀리서, 한 줄기 안개가 피어올랐다.
피어오르는 안개는 서늘하고 무거웠다, 마치 오래된 종이에 눅눅하게 스민 기억처럼. 어둡고 가라앉은 기운이 기분 나쁘게 에워쌌다.
서우는 순간 어리둥절하면서도 그 순간 한눈에 호란을 알아보았다.
“이번에도 기억 속으로 들어온 건가요?”
서우의 물음에 호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건… 다른 균열이에요. 누군가의 기억이 아니라, 의지에 가까운.”
그녀의 시선이 안개의 끝을 향하자 그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안개를 가르며 걸어오는 실루엣, 언 듯 보였지만 낯익은 걸음걸이와 키 심지어 부채를 쥔 방식까지—어딘가 자신과 닮아 있었다.
“누… 구지?”
상대는 멈춰 서서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는, 서우 본인이었다.
그의 눈은 생기를 잃은 채, 검은 안개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손에 쥔 부채, 서우의 것과는 다른 문양이다. 청색이 아닌, 먹먹한 어둠의 회색빛.
“… 나?”
“나는 네가 버린 가능성이야.”
“기억을 지우고, 외면하고, 진실을 두려워한 결과. 내가 남았지. 넌 진짜가 아니야. 넌 껍데기야.”
말과 동시에, 회색 부채가 펼쳐지고. 어둠이 그 주변을 감쌌다.
서우가 외쳤다.
“왜 자꾸… 날 시험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 분노와 혼란이 뒤섞였다.
“대체 왜! 왜 나 자신한테서까지 검증받아야 하는 건데!”
“진짜는 존재하지 않아, 넌 너 자신을 알지 못해. 아직도.”
회색의 그가 부채를 휘두르자, 공간이 찢어졌다. 뿌옇게 흩어진 안갯속에 그림자들이 번져 나왔다. 그리곤 곧 그림자는 말없이 서우를 향해 몰려들었다.
호란이 앞을 막아섰다.
“이 그림자는 당신 안에 있는 두려움이자, 가능성이에요. 피하지 말아요.”
서우가 숨을 몰아쉬며 부채를 다시 펼쳤다. 문양이 빛났다. 이번엔, 이전보다 더 강하게.
― 퍼어엉!
청색의 바람이 어둠과 충돌했다. 공기가 찢어지고, 그림자가 멈칫했다. 그 순간, 서우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진짜야! 진짜라고!”
“좋아. 그럼 버텨내 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땅이 흔들리고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또 다른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어딘가 익숙한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네온사인, 빗물, 무표정한 얼굴들.
서우가 살던 ‘현실’이었다.
호란이 말했다.
“지금 보이는 건 당신이 피하고 싶었던 지금의 삶이에요. 그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서우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대체 내가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안 하면 안 끝나는 거죠?.”
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으로 발을 딛자 또 다른 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의 공기는 낯설었다.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익숙해서 더 이질 적으로 느껴졌다.
네온사인이 반사된 빗물 웅덩이, 자동차 경적과 무표정하게 스쳐 가는 사람들. 도심 한복판, 자신의 원래 세계로 돌아와 있었지만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달랐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뭔가가 섞였어.’
서우는 확실하지 않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호란 그녀의 눈동자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빛났다.
“이곳은 당신의 현실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가짜의 현실이 겹쳐진 경계입니다. 주의하세요. 지금부터는 ‘몽연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가 만들어낸 틈이에요.”
그때였다.
빌딩 옥상에서,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이 보였다. 그 안에서—누군가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
절벽 끝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그였다 검은 부채의 주인.
중력이란 상관없단 듯 검은 연기에 감싸져 서우의 코앞까지 가뿐히 내려앉았다.
그의 주변 공기가 늦게 따라오는 듯 일그러졌다. 마치 이 세계가 그를 중심으로 반응하는 듯 보였다.
“지난 기억, 용케 지나왔나 보군. ”
그의 말투는 조롱이 뒤섞인, 이질적인 냉소였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왜 이런 일을 꾸미는 거죠?”
서우가 묻자, 그는 가볍게 비웃었다.
“나는 결의 균형자야. 존재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자. 몽연경을 현실로 꺼내올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존재지.”
그가 부채를 펼쳤다.
검은 문양이 피어오르며, 바닥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은 도시의 틈마다 퍼져, 사람들의 그림자를 비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서우의 발밑에서도 그림자가 흔들리며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내 또 다른 모습?’
그림자에서 나온 것은, 어린 서우가 아닌 바로 ‘청수원’을 떠나기 전, 차가운 눈을 한 청년 무기력한 체념과 분노를 가득 안고 있던 시절의 자아였다.
“피하고 싶었겠지.”
그가 비웃듯 입을 열었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편하니까. 그게 너였어.”
현실은 조각처럼 일렁였고, 부채를 쥔 서우의 손끝이 떨렸다.
부정할 수 없는 본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의 단호만 어투에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그래. 맞아. 외면했어..”
서우는 어두운 기운에 꽁꽁 묶인 체 자신의 지난날을 되짚었다.
아버지의 윽박지름에 눈물이 고인 체 입도 떼지 못했던 어린 날, 아버지가 손을 들어 어머니를 향하던 순간 번개가 치듯 섬광이 번뜩였고 서우는 정신을 잃었다. 어머니는 그날 이후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 후로 서우는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은 본인 때문이라는 사실에 하루도 마음 편히 살지 못했다.
서우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부채를 펼쳤다. 청매에 새겨진 문양과 글씨들이 오로라 빛 광을 내며 부채 끝을 잡은 본인의 손과 몸속 혈관이 서로 연결 되 흐르듯 생동했다.
“ 하지만.......내가 선택받은 자라면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