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매

- 검은 그 黑濫

by 큰 숲

6.


“ 하지만....... 내가 선택받은 자라면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겠지.”


서우의 말이 끝나자,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검은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서우를 내려다봤다. 그의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번졌다.


"재밌어지는군."


그 순간, 서우의 옆에 서 있던 호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호란은 검은 사내를 바라본 채 태세를 살폈다.


"뭐라는 거야! "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엉성한 자세에 화가 잔뜩 오른 서우는 곧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호란은 멈추라는 듯 손으로 조심히 신호를 보냈다.

씩씩거리며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서우에게

호란은 둘만 들을 수 있을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현실에서, 그는 이미 모든 걸 잃었어요.


가족도, 이름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딸까지.”


“… 떠나지 않기로 한 사람이에요.”


순간 화가 잔뜩 나 있던 서우는 알 수 없는 연민과 무거움에 짓 눌렸다.


“… 우린, 저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겁니까?”


그 질문에, 호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속삭임은 둘이 있을때 하지그래.”


그는 기억을 쪼개기 시작했다.

좁은 병실. 벽에는 누군가 손톱으로 긁은 듯한 자국이 있었고, 종종 창밖으로 혼잣말을 했다.


“연기가 피어… 부채가 빛나… 문이…”


이미 몽연경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망상’, ‘환각’

의사는 고개를 저었고, 가족은 외면했다.

깊은 안개의 틈 속.

그들은 낯선 풍경 앞에 서 있었다.

어두운 복도, 희미한 형광등 불빛, 문이 빽빽하게 늘어선 곳.

그곳은 오래된 병원 건물의 한 공간이었다. 창문은 가려져 있었고, 차가운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서우는 무언가 직감했다.


“여긴… 병원?”


호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아이가 병원복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열두 살쯤. 긴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발끝으로 바닥을 질질 끌며 걸었다. 눈빛이 비어있다.


“그 아이…”


서우가 묻자, 호란은 조용히 말했다.


“ 나예요.”

병실 창문을 통해 검은 안개가 스며들던 날.

그 안에서, 호란은 ‘그것’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검은 부채의 그. 흑람 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존재했다. 오래전부터, 모든 이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온 균열의 씨앗.


“네가 본 건 진실이야.”


그는 말했다.


“세상은 너 같은 자를 감당하지 못하지. 그러니, 네가 세상을 감당해. 문을 열고, 잊힌 기억들을 꺼내라.”


서우는 호란을 돌아보았다.


“그럼… 당신은 아이 때부터 몽연경을 보았고, 이 남자를…?”


호란은 눈을 감았다.


“처음엔 그를 믿었어요. 나만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어요.

그는 결을 치유하는 자가 아니라, 파괴하는 자였죠.”


검은 부채의 그가 말했다.


“넌 그걸 부정하지 못할 거다, 호란. 넌 나와 연결되어 있어. 나는 네 결에서 태어난 존재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이 무너졌다.

기억 속 병실이 찢어지고, 어린 호란이 괴로워하던 장면이 반복되었다. 고통, 환청, 구속, 침묵…

호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때-

흑람이 부채를 휘둘러 검은 안개를 피웠다, 그 안갯속에선 지옥을 연상케 하는 녹아내린 손과 발,

절규하는 눈동자가 들끓으며 병실의 기둥을 휘감아 요동쳤다.


“이게 바로 네가 외면한 기억이다, 호란.”


흑람의 목소리는 회색 공간을 가르며 울렸다.


“망각된 기억 속에서 버려진 너의 진심이 이런 괴물을 낳았지.”


흑람은 힘겨워하는 호란에게 달려들었다.

서우는 순간 본인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부채를 펼쳤다.

청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오로라 빛이 소용돌이치며 앞을 막았지만 흑람의 힘엔 비할 바가 못됐다.


-쾅!


공간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요동 치자 서우는 벽면으로 튕겨져 나뒹굴었다. 그 틈에 흑람은 낄낄거리며 호란의 목을 움켜쥐었다. 호란은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과거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으나 많이 힘겨워하고 있었다


“ 볼 수 있겠어? 다시 외면해! 그게 네가 항상 해왔던 방식이었잖아!”


서우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부채를 펼쳤다. 청매에서 나오는 청색 오로라 빛은 서우가 부채를 움켜쥔 손 혈관 속의 피처럼 그에 몸에 빠르게 흐르는 듯하였다.


“ 이봐! 검은 양반! ”


흑람이 다시 일어선 서우를 보자 손아귀에 잡혀있던 호란을 내팽개치고 서우에게 달려들었다.

서우는 청매의 기운을 다시 그에게로 조준하려 하려 했지만 흑람은 즐기듯 빠른 속도로 그의 공격을 피해 요리조리 몸을 숨겼다 드러냈다를 반복했다.


“ 뒤에 조심해요!”


순간적으로 뒤돌며 청매를 펼친 서우의 기운과 호란이 흑람을 향해 뻗은 백색 기운이 순간 하나로 합쳐졌다. 눈을 뜨고는 이겨내지 못할 정도의 밝음이 소음마저 삼키길 잠시, 흑람의 팔을 꿰뚫었다.

흑람은 반대 팔로 팔을 감싸고는 멈칫했다.


“… 이건 예상 밖이군.”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서우가 호란을 향해 소리쳤다.


“ 당신도 피해선 안 돼! ”


호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숨을 천천히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결을 바라보았다.

검은 부채의 그, 흑람은 잠시 멈칫했다.


“… 어쩌면, 진짜 계승이 시작될지도 모르겠군. 재밌어지겠어!”


그의 모습은 서서히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기억이 사라지고, 몽연경이 다시 고요해졌다.

서우와 호란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저 사람… 딸을, 잃었다고?”


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는 남은 거예요. 몽연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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