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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보호 구역

회사 밖은 위험해

by 일요작가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개인전 첫날, 점심 무렵 갤러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작가님, 언제 오세요?”

상대방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나는 평일엔 갈 수 없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뭔가 오해가 생긴 듯했다. 하필 전시 첫날에 부서장 회의와 회식이 겹쳐 아예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 자리를 비우는 게 미안해 전시 마지막 날에는 연차를 내고 지키겠다고 했지만, 대표님은 주말에만 나오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왜 안 오냐는 전화가 와서 어리둥절했다. 그러고 보니 전날부터 불안한 조짐이 있었다. 전시작을 설치해야 하는데 앞선 전시 정리가 늦어지면서 작품 설치가 다음 날 오전으로 미뤄졌다. 출근해야 하는 나는 그 시간엔 도울 수 없었다. 찜찜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대표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가님, 왜 안 오세요?"

내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좀전에 시작했고 정신이 없다고 하며 와서 손을 좀 보태라고 했다. 분명 내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순간 당황스러웠다. 택시를 부르려던 찰나, 다시 전화가 울렸다. 그냥 내일 하기로 했으니 오지 말라는 거였다.


다음 날 아침, 신경이 쓰여 출근 도장을 찍고 전시장으로 향했다. 갤러리와 회사가 가까운 게 다행이었다. 회의는 오후였고, 미리 출근해서 회의 준비를 마쳤다. 분주한 현장을 예상했지만, 전시장은 닫혀 있었다. 연락해 보니 11시에 설치를 시작한다고 했다.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제야 정리가 되나 싶었는데, 몇 시간 뒤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엔 갤러리 실장님이었다. 첫날인데 왜 안 오느냐고 물었다. 오전에 대표님과 통화했지만, 실장님에게는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꼬인 부분을 풀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오늘 못 간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요."

사실이었지만, 내 목소리는 이미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면 남은 그림을 가져가라고 했다. 내일 가져가면 안 되냐고 하니, 보관할 곳이 없다고 했다. 화가 단단히 난 듯했다. 회의를 앞두고 난감했다. 날도 이런 날이 없었다. 망설이던 찰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안 오실 거예요?" 나도 차갑게 대꾸했다. "지금 가요."


부장님을 찾았다. 회사에 작가일을 말하는 건 싫었지만, 거짓말할 정신도 없었다. 이럴 때는 솔직해야 했다. 한 시간만 자리를 비우겠다고 했다. “지금 내 차로 다녀오자.” 예상치 못한 말에 순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괜찮다며, 비장한 얼굴로 회의 시간은 꼭 지키겠다고 했다. 그녀는 입술이나 진하게 바르고 조심히 다녀오라고 했다. 신입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부장님을 앞세워 환불 원정대처럼 함께 가고 싶었지만, 내가 저지른 일이니 스스로 수습해야 했다.


택시 안에서 고민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억울한 마음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작품들이 진열된 전시장을 본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세심하게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실장님도 화가 좀 풀린 듯했다. "어제오늘 진짜 힘들었어요." 서운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온 김에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까지 찍으며 어색한 공기를 채웠다. 결국 전시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일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캔버스 네 점을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테헤란로 인파 속에서 끙끙거릴 때, 어디선가 대리님이 나타났다. 부장님께 돌아왔다고 보고하러 가니, "밥은 먹었냐?"며 가방에서 초콜릿과 떡을 꺼내 주셨다. 대체 가방에 옥수수는 왜 있는 걸까.


서둘러 회의 자료를 챙겨 회의실로 향했다. 이제 다시 김 팀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부서별로 지난달 업무 주요 업무와 성고를 보고했다. 진행이 누락된 건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미리 중간보고를 해둔 덕분에 어렵지 않게 설득할 수 있었다.


아, 내 전시회에서도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업무에서는 중요한 내용은 미리 공유하고, 예상되는 질문에도 대비해야 한다. 그것이 협업의 기본이다. 정작 초대전 준비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작품만 전달하고 끝이 아니었다. 관계자와 소통하고, 일정과 역할을 조율하는 것도 중요했다. 갤러리도 그림을 잘 소개하고 싶었을 테고, 나는 내 전시인 만큼 더 적극적으로 챙겼어야 했다.


회식자리에서 부장님은 잘 해결됐냐고 물었다. 평소 같지 않게 하소연하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럴 수도 있지. 다음부터 안 그러면 돼. 내일 커피라도 사 가서 ‘그땐 내가 잘 몰랐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해. 네 입장도 얘기하고. 가끔은 TMI도 필요해."


다음 날, 케이크를 들고 전시장에 들렀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반기며 관람객들에게 소개했다. 나보다도 작품 설명에 열심이었고, 반응이 너무 좋다며 다음 아트페어도 함께하자고 했다. 그날 일에 여운이 가시지 않아 삐걱거리는 나는, 여전히 아마추어였다.


회사 밖은 야생이었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한 건 직장이었지만, 정작 그 안에서 위로를 받고 안도했다. 무의식적으로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전업작가가 되고 싶다면서도 곤란한 순간엔 늘 직장인이라는 방패를 내세웠다. 하지만 나는 이미 화가였다. 작품을 그리고, 전시하는 모든 순간에.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 이제 진짜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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