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움직이게 하는 사람들
나는 메기를 키운다. 꽤 오랫동안 키워 왔다. 내 안에는 따라 하기를 좋아하는 메기들이 살고 있다. 요놈들은 주인을 닮아 활발하지 않아 숨어 있는 날이 많지만, 멋진 사람을 만나면 튀어나와 정신없이 헤엄친다. 그러면 내 속이 마구 울렁거린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질투인지, 경쟁심인지, 혹은 순수한 동경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거다. 게으른 나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한 건 바로 메기 효과였다. 그 덕에 나는 다리 찢기 학원을 다닌 적도 있다.
요가 시간마다 강사가 자주 시키는 동작이 있다. “다리를 최대한 벌려 보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90도였다. 그 상태에서 상체를 앞으로 숙여야 하는데, 팔만 허우적거릴 뿐이다. 보다 못한 강사가 내 등에 거의 업히다시피 눌렀다. 나보다 늦게 등록한 회원들은 곧잘 해내는데, 나는 뻣뻣 그 자체였다. 아마 그때였을 거다. 다리 찢기가 꿈이 된 순간이. 요가를 3년 넘게 했지만, 내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다리 찢기 꿈이 시들해지던 어느 날, 다리를 180도로 뻗는 다섯 살 조카를 보고 잠자던 메기가 꿈틀거렸다. 아이라서 유연하겠거니 했지만, 마치 잊고 있던 꿈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새해 계획에 '다리 찢기'를 추가했다. 그러던 중, 뜻밖의 다리 찢기 귀인을 만났다.
귀인은 바로 컬렉터다. 푸바오를 좋아하다가 알고리즘으로 내 그림을 알게 됐고, 전시장에도 오고 작품까지 소장해 준 분이다. 전시장을 벗어나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 컬렉터와는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 몰라 다른 작가에게 팁을 얻기도 했다. 어색함은 잠시, 우리는 푸바오와 다리 찢기로 단숨에 가까워졌다. 그녀가 스트레칭 학원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사실 내 꿈이 다리 찢기였다고, 굳이 새해 계획으로 적어둔 리스트를 보여줬다. 우리 만남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다니는 학원을 소개받았고, 본격적으로 다리 찢기, 정확히는 가로 찢기 수업을 들으며 연습에 매진했다.
이 특별한 인연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푸바오 소식으로 안부를 전했고, 전시를 핑계 삼아 얼굴도 보았다. 그녀는 충주에서 서울을 오가며 학회에 참가하고, 문득 생각나면 용인으로 판다를 보러 가는 낭만닥터였다. 겨울이면 눈을 보러 삿포로로 여행 간다는 이야기에, 나도 멈췄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한참 수영에 빠진 그녀와 톡을 나누다가, 나도 덩달아 수영 바람이 들어서 지난여름 코로나 이후로 처음 수영장을 찾았다. 내가 자꾸만 그녀를 손민수 하는데 오히려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알려 주었다. 자신이 아는 것들을 아낌없이 알려 주며, 언젠가는 함께 하자고도 했다.
퇴근하고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다들 대단하다고 칭찬한다. 일과 후에 뭔가를 하는 건 정말 독한 거라는데, 둘러보면 대단한 사람들 투성이다. 일본어 공부하는 의사, 유튜브 하는 워킹맘, 세계 대회 출전을 목표로 자전거 타는 대리님... 내 주위에는 왜 이렇게 멋쟁이들이 많은 걸까?
멋진 사람들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그림에 있어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멋쟁이는 단연 스승이다. 그의 곁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선생님처럼 행복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라는 마음이, 어느 순간 ‘선생님처럼 빨리, 잘 그리고 싶어!’로 변해갔다.
한 번은 선생님의 작업 속도를 따라 하다가 가랑이가 찢어질 뻔했다. 그처럼 뚝딱뚝딱 작품을 빠르게 완성하고 싶었다. 분명 동시에 새 캔버스를 꺼낸 것 같은데, 며칠 뒤면 벌써 사인을 했다고 했다. 고수의 실력은 생각도 못 한 채 난 아직 반도 못 그렸다며 발을 동동 굴렸다.
가만 보니 선생님은 우리가 떠난 뒤에도 새벽까지 화실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서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와 두 시간 정도 더 그림을 그렸다. 못해도 8시간은 자던 내가 잠을 줄이니, 살이 빠지고 회사에선 커피를 자꾸 찾았다. 뱁새가 황새를 쫓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더니, 딱 내 꼴이었다. 그래도 이 시기에 그림 실력이 확실히 늘었다.
얼굴이 점점 퀭해지자 선생님은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쌤도 새벽까지 작업하시잖아요."하고 말대꾸하자, 그는 "나는 전업작가잖아."라고 답했다. 자꾸만 내가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의 한마디는 폭주하던 메기를 진정시켰다. 그래놓고선, 야근으로 작업을 못했다거나 주말에 좀 쉬었다고 하면 그렇게 잔소리를 하신다. 이러니 내가 그림을 멈출 수가 없다.
요즘 나를 움직이게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과거의 나 자신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나는 매일 아침 요가를 하고 업무 시작 전까지 글을 썼다. 그렇게 쓴 원고로 책을 내기도 했다. 지금은 아침에 제때 눈 뜨는 것조차 큰일이다. 예전엔 하루도 거르지 않던 아침 운동이, 이제는 하루만 해도 대견할 지경이다. 나이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 일을 해내는 50대도, 60대도 많다. 이제 겨우 40대이다. 여전히 뭐든 할 수 있는 나이, 그리고 그런 나이고 싶다.
30대의 내가, "한 번 해봤잖아? 왜 못해? " 하며 자꾸 나를 자극한다. 이번 녀석 좀 얄밉다. 오늘도 계획했던 새벽 기상은 실패했지만, 잠깐이라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곧 8시가 되면 지하철을 타러 가야 한다. 출근길 원고를 읽고 교정하면 된다.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느리지만, 조금씩 해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메기들은 늘 새로운 시도를 한다. 혼자 앞서 나가는 법이 없다. 언제나 함께하자며 손을 내민다.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고, 게으른 나를 이끌어 준다. 자연스럽게 나 역시 뭔가를 시도하게 된다. 어느새 직장인이면서 글도 쓰는 화가가 되어 있었다.
어제보다 나은 나를 보며 누구보다 기뻐하며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바로 메기들이다. 그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헤엄치며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