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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판다

너를 만난 건 내게도

by 일요작가 Mar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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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판다를 그린다. 더하자면 판다를 통해 혼자, 혹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유화로 표현하고 있다. 5년 전,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던 때에 운명처럼 그를 만났다.


곰을 그릴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별명이 곰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귀여운 동물보다는 근사한 풍경이나 인물화를 그리고 싶었다. 자유로운 붓 터치가 매력적인 인상파 화가들처럼.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독창적인 것을 구축해야 했다. 모작하고 싶은 명화는 많았지만, 막상 무엇을 그릴지 막연했다. 어떻게 표현할지도 문제였다.


작업 방향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다. 화실에서 만난 언니와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근황을 전하던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대체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

언니가 내 손등을 토닥이자 꾹 참아왔던 답답함이 한꺼번에 터져 버렸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당황한 언니는 급히 휴지를 찾았다. 먹고사는 일도,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이럴 일인가.


울면서도 작업은 계속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붓을 들고, 뭐든 시도했다. 직접 포즈를 취한 사진을 두고 르누아르의 따뜻한 빛 표현을 따라 하며 채색했다. 책을 읽고 산책하고, 낮잠 자는 모습을 그렸다. 내가 좋아하는 일상의 장면들이 캔버스 위에 새겨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판다를 만났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판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영상 속 주인공은 마치 자신만의 브이로그를 찍는 것처럼, 무아지경으로 대나무를 먹고, 천천히 산책하다가 나무 위에서 한참 잠을 자고, 깨어나서는 마치 처음 맛보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대나무를 먹기 시작했다. 또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 오랫동안 풍경을 바라보았다. 화면 위로 ‘판다는 독립적인 동물이다’라는 자막이 떴다.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동물과 아이들은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귀여운 생명체들에겐 매 순간이 새롭고 세상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었다. 나는 달랐다. 내 시간은 늘 남을 향해 있었고, 정작 나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을 쓸 줄 몰랐다.


붓을 들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위한 하루를 보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판다처럼 좋아하는 일에 깊이 빠져들었다.


구상하던 장면에 사람 대신 판다를 넣어봤다. 그동안 독서하거나 산책하는 인물을 그렸지만, 뭔가 특별함이 부족했다. 이번엔 사색하는 뒷모습을 까맣고 하얀 털뭉치로 대신했다. 그렇게 나와 판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판다의 치명적인 귀여움 탓에 자칫 작업이 가벼워 보일까 걱정되었다. 유화 물감으로 깊이를 더해 보려 했다. 조색한 물감을 쌓아 밀도를 높이며 유화만의 질감을 살리고자 했다. 남다른 기교보다는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에 집중했다. 채색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채도가 낮아졌는데, 그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색감은 어느새 내 고유의 색이 되었다.


판다를 담은 작품들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여러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관람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몇몇 관람객들은 판다로 가득한 부스를 보고 작가가 중국 사람이냐고 묻기도 했다. 혼자 있는 모습보다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반기는 이들도 많았다.


나 또한 몰입하는 과정을 온전히 즐기게 되면서, 타인과 함께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다. 사랑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던데, 그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내 캔버스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홀로 있던 그림 속 주인공은 점점 더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제는 오리, 토끼와 함께하며 즐거움을 나눈다. 집에서 놀던 판다는 공원으로 나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들이 한층 돋보이도록 배경색의 채도를 낮추고 주요 요소들은 원색으로 칠해 대비를 살렸다.


자연을 그리는 일은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자연 친화적인 사람이 아니다. 꽃구경을 가도 꽃 사진보다는 셀카를 찍었다. 산보다는 도시를 좋아했고, 나무를 세심하게 관찰한 적도 없었다. 산과 하늘을 그림의 배경으로 채우면서 자연이 주는 매력에 빠졌다. 처음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주변의 나무들을 유심히 살폈고, 가끔 등산하며 계절의 변화를 느꼈다. 그렇게 점점 자연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곁엔 언제나 판다가 있었다.


나만의 밀도 있는 질감 표현이 나무를 표현하는 데 잘 어우러졌다. 나무를 잘 그렸다는 칭찬을 받고는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문득, 동물 없이 풍경만을 그려 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림 속 주인공에게 친구가 생긴 것처럼, 나도 작업을 하면서 많은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내 작품을 소장한 분과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안부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전시회를 다녀간 관람객들은 SNS를 통해 따뜻한 응원을 전해 주었다.


관람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연히 푸바오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다. 푸덕이들과 공감하는 사이 나도 어느새 푸덕이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며 연구했다면, 이제는 바오패밀리의 일상을 매일 접하며 영감을 얻는다. 푸바오를 만난 게 기적이라던 송바오 님처럼, 나 역시 판다를 그리게 된 것이 큰 행운이었다.


처음 판다를 그릴 때, 딱 10점만 완성하고 그만둘 마음이었다. 동물이 아닌 다른 대상을 탐색하며 지금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어느덧 판다를 담은 작품이 100점을 넘어섰다.


같은 소재를 계속 그려도 될지, 새로운 대상을 찾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 화풍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화가를 꼽으라면 변함없이 르누아르, 모네, 보나르를 떠올린다. 르누아르의 따뜻한 색감, 모네의 자유로운 붓질, 보나르의 감각적인 구성을 그대로 닮고 싶다. 그것들이 나만의 감성과 어우러져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이제야 작품을 알리기 시작한 단계이니, 당장 극적인 변화를 줄 필요는 없다. 아직 내 판다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이 많을 테니까. 그렇다고 창작에 대한 연구를 멈출 수는 없다.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에서 시작해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어떻게 표현하면 확실한 개성이 묻어날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아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대중적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초보 화가의 고뇌도 여느 예술가 못지않다.


하루아침에 찾을 수 있는 답이 아님을 알기에, 커피를 마시거나 지하철을 기다리며 문득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판다 없이 풍경만 그려볼까?


고민만 하다 보면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 마무리해야 할 캔버스로 시선을 옮긴다. 티타늄화이트에 스칼렛을 살짝 섞어 토실토실한 엉덩이에 칠한다. 둥근 곡선 위로 분홍빛 생기가 감돌자 절로 미소가 번진다. 색이 마음에 들어 방실방실한 볼로 붓을 옮긴다. 살짝 볼 터치를 더 하며 속으로 소리친다. 너무 귀여워!


정말 귀여우면 다인 것 같다. 귀여움이 나를 구한다. 내일은 양송이 귀와 말랑젤리 코를 칠하고 완성해야 하니 붓끝이 바빠진다. 아무래도 당장 판다와 이별하긴 힘들 듯하다. 계속 그리다 보면, 판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또 한 번 반짝이는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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