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위한 하루
“팀장님, 이제 작가님으로 변신해야죠. 얼른 칼퇴해요”
금요일 퇴근 시간, 옆자리 대리님이 속삭이듯 인사한다. 내가 화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그녀만의 은밀한 인사법이다.
퇴근과 동시에 또 다른 출근이 시작된다. 내게 회사는 생활을 위한 아르바이트 같은 것. 진짜 일터는 작업실이고, 진짜 직업은 화가다. 예전엔 이런 사람을 ‘일요화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요화가의 주말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다. 이날만큼은 꿈꾸는 화가의 삶을 온전히 누린다. 퇴근 후 자유를 위해 다섯 번의 출근을 견뎌낸다. 그렇게 맞이한 소중한 이틀, 나는 아침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좀 둔한 편이다. 남들보다 느긋한 데다 남의 일이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전시가 연달아 잡히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작품 수는 빠듯했고, 작업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해낼 수 있을까?’ 자꾸 자신을 의심하다 보니 불안은 점점 커졌다. 평소라면 흘려들었을 말들이 신경 쓰였고, 괜한 미안함과 서운함이 쌓였다. 예민해진 내 모습이 낯설고 불편했다
그럴 땐 몸을 움직여야 한다. 무기력이 습관이었기에 우울함이 스며들 것 같으면 일단 밖으로 나갔다. 사람을 만나고 산책했다. 그래도 안 되면 운동을 했다. 불안에도 효과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온몸이 땀에 젖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머릿속이 비워졌다. 심장이 뛰는 속도만큼 불안은 사라졌다. 몸을 움직이면 마음도 따라가는 법이었다. 이제 여유를 되찾았지만, 달리기는 어느새 주말의 일부가 되었다.
동틀 무렵 달린 뒤 씻고 곧장 이젤 앞에 앉는다. 점심은 배꼽시계에 맞춰 간단히 해결하고, 다시 붓을 든다. 조색해 둔 물감을 다 쓸 때까지 몰두할 기세지만, 오후 3시가 되면 잠깐의 낮잠을 즐긴다.
해가 지기 전에 동네를 산책하며 커피 한 잔을 산다. 그리고 곧장 집 안의 작업실, 일명 ‘집업실’로 들어간다. 사두고 읽지 않은 책을 펼쳐도 좋을 테지만, 졸릴까 봐 몸을 움직이는 작업을 택한다.
저녁은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 먹고, 찜해둔 영화 한 편을 본다. 마감이 있는 원고가 있다면 글을 쓰기도 한다. 작업한 그림이 잘 마르고 있는지 확인하고서야 침대에 눕는다. 내일 퇴근 후 그려야 할 진도를 생각하며 눈을 감지만, 그대로 잠들기 아쉬워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든다.
일요일은 온전히 작가로 살 수 있는 하루다. 토요일도 비슷하지만, 친구를 만나거나 생활을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요화가’의 하루를 제대로 보내려면 사전 준비가 필수다. 가령, 하기 싫은 일을 미리 해두는 것이다. 전날 집을 청소하고 장을 봐두면 일요일이 한결 여유로워진다.
매일 두 가지씩 싫어하는 일을 하면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달과 6펜스>에서 화자는 이를 실천했다. 그가 실천한 두 가지는 바로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 나는 거기에 청소도 하고 달리기도 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 어쩌면 작가로 사는 삶이란, 곧 정신 수양의 길인지도 모른다.
하루종일 혼자 작업하다 보면 문득 쓸쓸해진다. 작업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창밖 소음과 함께 외로움이 밀려온다. 세상 밖에서는 나만 모르는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싶어 잠시 핸드폰을 들려다 금방 내려놓는다. 지금, 어떤 자극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즐거움을 대체할 수 없으니까.
하루 중 외로움을 쫓을 여유조차 없다면 어쩌나 싶어 누군가를 불러낼까 고민해 본 적도 있지만 역시 무리였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캔버스 앞에 앉는다고 해서 곧바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30분 후에 약속이 있다고 생각하면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온전히 작업에 몰입하려면 서너 시간은 방해받지 않아야 했다. 결국, 고독을 각오해야 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제법 예술가라도 된 듯하다.
그림을 그리면서 몰입과 고독을 친구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몰입의 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고독이 찾아오고, 고독이 깊어지면 또다시 몰입이 나를 감싼다. 그렇게 둘은 끊임없이 교차하며 나를 캔버스 속으로 이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몰입과 고독을 길들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마법 같은 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일요일은 사랑이다.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 어김없이 출근해야 하니 월요일이 유난히 싫다. 매달 물감과 캔버스를 살 돈이 들어오니 마냥 미워할 수도 없다. 월요일을 미워한들, 늘어나는 건 커피뿐이다.
지금 당장 매일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겠다는 결심할 용기는 없지만, 유일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애쓴 시간이 쌓이면 언젠가는 그림만으로 살아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싫어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사이좋게 나누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