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유미
언젠가부터 엄마는 입안이 아프다고 했다. 정확히는 혀가 화끈거린다는 거다.
“치과에 가 봤어? 구강내과라는 곳도 있대.”
“물 좀 자주 마셔, 가습기도 틀고!”
타지에 있던 나는 검색한 정보를 잔소리와 함께 열심히 실어 날랐다.
명절에 만난 엄마는 자꾸 입이 마른다며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밥맛도 없다고 했다. 그제야 심각성을 느낀 나는 구강내과에 가봤냐고 물었다. 이미 동네 의원부터 대학병원까지 전전한 상태였다. 엄마는 자신이 아프면 우리에게 피해가 될까 봐 건강검진도 빠짐없이 챙기는 분이었다.
“정확한 병명은 모르고, 그냥 면역력이 약해져서 그렇다고 하네....”
혀가 아프다고 해서 엄마의 삶이 멈추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새벽같이 일을 나갔고, 주말이면 내게 보낼 반찬을 만들겠다고 장을 봤다. 엄마의 병은 마치 티눈 같았다. 불편해도 평소처럼 생활하시니 곧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또다시 그녀의 병을 잊어갈 즈음, 엄마가 갑자기 서울에 온다고 했다. 내가 서른 초반이던 때였다. 딸이 10년 넘게 타지살이하는 동안, 바쁜 살림 탓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분이었다. 그런 엄마를 움직이게 한 것은, 자신과 비슷한 증상을 치료했다는 한 병원의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교대역 근처 한의원이라는데, 또 건강 프로그램을 보신 모양이었다. 그거 다 광고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으면 이러실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무심한 딸이라 죄송했다.
나는 보호자가 되어 그동안 들어 온 증상을 대신 설명했다.
“입안이 마르고 혀가 화끈거린대요.”
한의사는 엄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어요?”
“재작년인가....”
내가 다시 대신 나서려는 찰나, 엄마가 말을 막았다.
“그게 요양보호사 자격증 딸 때니까... 5년 전이네요”
“그렇게나 오래되셨다고요?”
한의사의 놀란 반응에 엄마는 마치 막혔던 둑이 터지듯, 통증만큼이나 오래 묵혀둔 기억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민간요법을 시도했던 일, 눈물로 잠들지 못한 밤들, 병든 남편의 수발과 우리 셋의 학비까지, 지난 삶의 무게를 통째로 쏟아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공감의 종지부를 찍는 한마디에 눈물샘이 터진 건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 오히려 엄마는 신이 난 듯, 잠을 줄여가며 자격증을 준비했던 이유와 그 무렵 입안이 이상해졌다며 증상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했다.
진료가 끝나고 나면 엄마에게 대체 요양보호사는 무슨 소리냐고,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료실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동안, 그 이유를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한의사는 엄마의 말을 끊지 않고 눈을 맞추며 경청했다. 바로 진단하고 처방하기보다는 먼저 공감으로 마음을 받아 주었다. 정작 딸인 나는 의사처럼 진단부터 내리려 했지만, 의사는 딸처럼 엄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다.
“약값이 왜 이리 비싸노? 방송 나왔다고 그러나?!”
엄마는 내가 계산한 것이 미안해서인지, 조금 전 털어놓은 속내가 신경 쓰였는지, “조곤조곤한 게 좀 여우같제? 약 팔려고 그런 건가.”라며 괜히 한의사를 흉봤다.
바가지든 여우든, 엄마는 담아둔 이야기를 쏟아낸 것만으로도 한결 가벼워 보였다. 어딜 다니는 걸 꺼리던 엄마는 그날 덕수궁 돌담길을 소녀처럼 걸었다. 그녀의 가벼워진 발걸음만큼, 내 가슴엔 묵직한 부채감이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 나는 밀린 부채라도 갚듯 엄마의 건강과 기분을 챙기기 시작했다. 면역력에 좋다면 뭐든 공유했고, 건강검진 결과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리고 그날의 한의사처럼 물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그래서 속상했겠다거나 좋았겠다는 작은 표현도 잊지 않았다.
한번은 공진단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혼자 약을 지으러 갔다. 예전 한의원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무래도 화병이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제법 한의원 좀 다녀 본 사람처럼 말했다.
“많이 힘드셨겠네요.”
“네, 엄마가 혼자서....”
“아뇨, 따님이요. 그때 어렸을 텐데 자기도 힘들었겠다.”
아니, 한의사들은 심리학을 따로 공부하는 걸까? 갑자기 들어온 반존대와 공감의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고도의 영업 전술이라고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그 한마디에 열여덟 살의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랜 시간 삶의 무게를 홀로 짊어진 엄마의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한 그 시절의 나를 자책했었는데,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그 아이를 안아줄 수 있었다.
공진단 덕분에 엄마는 "말로만 듣던 걸 먹어 본다"며 역시 큰딸이 최고라고 했다. 하지만 통증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조금이라도 무리한 날이면 마스크를 쓴 채 누워 계셨고,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목 안이 따끔해졌다.
그래도 이제는 예전만큼 지나간 시간을 붙들고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때도, 지금도 서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같은 시간 속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충분히 힘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늘 상대의 아픔 앞에서 위로가 서툴렀다. 속상한 나머지 되레 화를 내기도 하고, 조급하게 해결책을 찾아 주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서툴더라도 마음을 함께 느끼며 곁을 지켜주는 따뜻함이라는 것을.
누군가 위로가 필요할 때면 나는 한의원에서 배운 위로의 언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내 안의 아이에게도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한다.
“많이 힘들었겠다고, 그리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