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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윰 Nov 20. 2023

꼭 나아야 하나, 나아가면 그뿐이지

질병은 아니잖아요, 일종의 성격일지도 

재밌지 않나, 때론 씁쓸하지만. 인간이란 '반드시 언젠가 죽을 것'이란 당연한 진리 외엔 그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죽을 건 알지만 언제, 어느 때, 어떤 식으로 가게 될지는 모르며 살아 있는 동안에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존재다. 성취, 목표의식, 목적만 불태우며 한껏 내달리다 보면 현타를 맞이하고, 그렇대도 나아가지 않을 수만은 없는... 그래서 무수한 이들이 아프고, 그 질병은 '고쳐야 하는 것'이라고 교육 받지만 이젠 묻고 싶다. 꼭 나아야 하나, 한 걸음씩 나아가면 그뿐 아닌가. 



출처: 핀터레스트


스스로 왜 살아 있냐고 물어본 적 있다. 실은 꽤 자주 묻는다. 난 왜 살아 있어야 하느냐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내 윗대에 있던 많은 철학자들도, 심리학자들도, 심지어 과학자들도 풀지 못한 질문이니 어쩌면 당연한가.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다. 왜 태어나는지, 왜 죽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끝없이 질문할 따름이다. 수명은 유한하나 그 끝이 보일 때까지 우린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민폐'가 되니까. 나는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매일 일어나서 일터로 나아간다. 


극도의 울증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만든 힘도 "산 입은 무섭다"라는 당연한 만고의 진리였다. 단지 숨만 쉬고 있을 뿐인데도 월세, 공과금, 식비, 교통비, 핸드폰비...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만 계산해도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죽으면 죽었지, 다만 방구석에 처박혀서 시간을 죽이는 비용을 누군가에게 부담하게 하는 건 너무도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 해서 지쳐 버린 몸뚱이로 겨우 일어났고, 공허하게 텅 비어버린 내면을 돌아볼 시간이 없게끔 일터에서 온갖 일을 다했다. 목표도 방향도 없이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누군가는 회사의 임원을 꿈꾸나 싶었다 할 만큼 내달렸으나 실속은 없었다. 회사의 일은 내것이 아니며, 회사가 잘 되어도 내가 병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빠른 시간 내에 알았다. 그리 빠르진 않은가... 스물다섯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기본 투쓰리잡씩 하면서 지내온 시간을 따져보니 올해로 8년째다. 실상 스물 한 살에 반수로 학교 입학했을 때부터 알바 2-3개씩은 병행했으니까 일한 시간은 10년 정도 됐다. 그때 업무도 바이럴 마케팅, 과외, 홍보, 카피 쪽 업무였으니 어디가서 온라인 마케팅 시조새라고 말하곤 한다. 키워드 기반의 바이럴 마케팅이 시작하던 시기부터 SNS 콘텐츠 마케팅이 뜨기 시작할 때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실무자로 현업에 있었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마케팅이란 게 결국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이다. 홀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콘텐츠 기획, 제작 업계도 마찬가지다.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선택 당해야 한다. 가급적 많은 이들이 봐주는 게 좋고, 사람들이 모일 때 '진정한 파급력'이 일어난다. 아무도 보지 않는 콘텐츠란, 그저 일기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이제는 '나'란 사람에 대해서도 참 많이 생각한다. 다른 콘텐츠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소설이란 글은 참 우습게도, 작가가 너무도 '훤히' 보여서다. 그 사람의 가치관, 신념, 꿈, 생각... 뭐 그런 것들. 글 내용이 아무리 탄탄하고, 문장력이 좋아도 가치관이 비뚤어진 사람의 글은 추하다. 그런 글을 발견한 순간, 나는 아... 거를 작가가 하나 생겼네 하니까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중은 개, 돼지다 란 말이 참 익숙하게 들려오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겠으나 생각보다 대중은 영리하다. 머리로 알지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이미 다 느낀다. 한 마디로 "찐"은 통한다. 뭘 모르고 알고는 중요하지 않다. 대중의 무의식은 무릇 다 통하기 마련이라 "진짜"가 담기면 성공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공 공식을 따르면 좋겠지만 기묘하게도 성공 공식을 따르지 않아도 잘 된다. 이를 테면 (오래된 예시긴 하나, 그때까지의 천만 영화가 찐이라고 생각하기에) 영화 <왕의 남자>라던가 영화 <살인의 추억> 같은 것들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편협한 시각을 가져선 안 되며, 어느 한쪽으로 깊이 치우쳐서도 안 된다. 자기만의 신념, 나름의 개똥철학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궤변이 아닌 '철학'이어야 한다. 곧, 자기만의 근거가 확실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집'이어선 안 된단 이야기다. 고집도 아니어야 한다. 세상과 사람을 아우를 수 있다면 좋고, 너무도 아름답고 따스한 '환영'만을 다루는 것도 싫다. 나는 특히 소녀스러운(소년, 소녀로 나누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여기서 쓰겠다, 명사적인 느낌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나는 이 표현을 좋아한다) "모든 건 다 잘 될 거야, 우리 믿자!"라는 식의 따듯하기만 한 어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세상은 실로- 척박하다. 물론 따스하기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리 쉬운 월드는 아니다. 모두 각자의 이유로 고통 받고, 각자의 이유로 일어서며 또 각자의 이유로 좌절하고 그런 한편 각자의 방식으로 극복한다. 겉보기에 편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고통은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지옥' 하나쯤 이고 사는 것이다.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순간 나는 누구도 속단하지 않으려 마음 먹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나란 사람도 누군가의 눈에는 배부른 헛소리 타령이나 하는 사람일 테지만, 내 내면은 지옥일 때가 많다. 허하고 공허하며 텅 빈 우물에 조금 고여 있는 물방울을 바라만 보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 근원의 허무, 왜 나는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나는 계속 물었고, 썼고, 읽었고, 보았다. 


허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원스런 답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못 찾을지도 모른다. 나를 뒤덮고 있는 이 기묘한 우울과 한탄 그리고 좌절과 지리멸렬함, 허무함, 울적함 이것들이 한때는 질병이라 여겼다. 지금은 안다. 이것은 나을 수 있는 문제도, 제거하거나 덜어내야 하는 문제도 아닌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함께 내일, 모레... 그리고 언젠가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동행자다. 묵직한 짐 혹은 그림자처럼 여겼는데 이제와서는 알겠다. 아주 지쳐버린, 낡아 헤져버린 신발과 같은 것, 허나 벗을 수는 없다. 마지막에 어느 순간, 정말 진정으로 마지막이 오면 그것은 나의 닳디 닳은 맨발이 될 테다. 그 순간이 어쩌면 통합의 때가 아닐까. 나의 가장 연약한, 하지만 지면을 계속 밟고 디디고 스치듯 매번 스쳐지고 피흘리며 아파할 수 밖에 없는 나의 가장 연약한 면이...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허기, 내 안의 지옥, 우울감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바야흐로

끝나지 않고 돌고 도는 돌림노래와 같은 것.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속단할 수도, 판단할 수도, 갈급할 수도, 집착할 수도 없고 그랬을 때 더더욱 꼬여가기만 할 따름이란 점을 요즈음에는 생각한다. 인간인 이상 때론 속단하고 판단하고 갈급하며 집착하고 그리하여 불운하나 동시에 행복하며 찬란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넘어선 다음 스텝에서는 어떤 게 보일지 궁금하다. 집착을 버리면 많은 것이 나아질 거란 걸 알지만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집착한다. 집착에 대한 속박도 일종의 '습'과 같은 거라 떨쳐 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나아진다, 나아질 것이다, 건강해질 것이다 이런 생각 말고 나아간다, 그저 그뿐이다 이 정도로 마음을 고쳐간다면 어떨까. 나는 내가 그리 건강하지 않다는 걸 안다. 동시에, 세상을 둘러싼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은 저마다의 이유로 병들어 있다는 것 역시 안다. 


내가 그렇기에 타인도 거울처럼 보는 것이나 (그것이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다들 그 아픈 구석을 끌어 안고 어떻게든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의 첫번째 단계는 무언가를 이룩하겠다는 집착을 버리는 것, 다음 단계는 내가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는 것, 그 다음 단계는 내가 진정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자유로이 찾아보는 것. 나는 이제 이 3번째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나는- 돈벌이를 벗어나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해야 한다>라는 의무의 세계를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여전히 모르겠다. 내 몸뚱아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고 싶지도 않은 노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싫지만,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내 몸뚱아리를 이곳에서 먹여 살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낫지 않을까. 무엇일까... 그런데 동시에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무엇'을 어쩌면 나는 죽는 순간까지 모르지 않을까. 


인생은 한정적이고 짧은 듯하나 너무도 길다. 기나긴 순간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게 답답했는데, 이건 '인력'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르겠다. 어떠한 인생을 일평생 노래하게 될지... 목표 지향적이던 시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나의 인생은 너무도 실패했다. 이보다 아래로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일종의 집착 아닌 집착을 여전히 하고 있는데... 실패한들 죽지는 또 않을 것이다, 스스로 놓지 않는 한. 실패와 실수 그리고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왜, 지금, 오늘, 여기에 함께하고 있을까. 


나는 <인생의 회전목마>라는 곡을 참 좋아한다. 끝없는 선문답, 기이한 시간들은 잠시 멈추어두고 우선 노래를 들어야 하겠다. 이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작곡가는 어떤 생각으로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것을 몰라도 이 노래는 좋다. 그 리듬감, 곡절, 공백, 공허 그리고 멜로디... 그거면 일단은 된 건지도 모른다. 나의 호흡, 멜로디, 목소리 그리고 허무까지도 하나의 곡을 만드는 중인 건지도, 끝을 맺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노래를 온 세월을 다해 만들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다음 장으로, 다음 멜로디로 넘어가야 하겠지. 그렇대도 조급하게 생각은 하지 않으련다. 그런다고 해결되거나 해갈될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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