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서 과장님이 휴직하면
돈은 누가 벌어요?
내가 휴직계를 낼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이다. 내 걱정은 나만 하고 싶은데 주변에서는 그걸 가만 놔두지 못하나보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도 있겠지만 실제로 무슨 대책이 있기에 휴직이 가능한지 정말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휴직은 하더라도 먹고 살 돈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다행히 일정 기간 동안엔 월급의 일부가 나오긴 한다. 그러나 평달 월급의 50%도 안되는 돈이므로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야? 혹시 부모님이 도와주시기로 하셨어?
그랬다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02.
마이너스 통장 뚫었어요.
이제부터 빚잔치 시작이에요.
그렇게 우는 소릴 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한 표정이 된다. 그러고는 '고생하라'는 하릴없는 위로를 하며 자릴 뜬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다. 당연하겠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내가 걱정되거나, 나에게 직장으로부터 탈출방법의 힌트를 얻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다. 나도 자신들처럼 뾰족한 수 없는 '답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허나 나와 동갑인 동기녀석은 제법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는 직장에서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속얘기를 터놓고 지내는 친구였다.
- 혹시 휴직기간 끝나면 퇴직하겠다는 거 아니야?
그와는 평소에도 퇴직 혹은 이직에 대한 고민을 많이 나눠와서 그랬는지 대뜸 '퇴직'얘기부터 꺼냈다. 하지만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렇다'라는 대답을 듣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이 친구의 심리 또한 앞서 말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들도 자신처럼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을 거라 믿고 싶고,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아닐까.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겐 적당히 둘러대고 넘겼지만 이 친구에게까지 그럴 순 없었다. 동기사랑 나라사랑 아닌가.
03.
그는 외벌이에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 거기에 강아지까지. 즉, 누가 시켜도 본인 스스로 휴직은 엄두도 못낼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직장생활이 할만하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업무능력이 출중한 그를 가만놔둘리 없었다. 100%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에게 120%, 150%의 업무를 주고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때까지 등골을 빼먹는 것이다.
회사의 시스템이란 그렇게 쓸만한 녀석만 죽어나는 구조다. 그러다 못쓰게 되더라도 대체재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나만 봐도 그렇다. 결국 번아웃이 와서 나가 떨어지지 않았는가.
이 정도로 열심히 하면
장사를 해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친구와 종종 그런 얘기를 하곤 했다. 그만큼 회사에서 갈려나가는 처지의 우리 둘은 동병상련의 애환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그러던 참에 내가 휴직을 나간다고 하니 못내 심란했던 모양이었다.
04.
집부터 사는 걸 추천해.
거기서부터 시작이야.
휴직 이후 수입을 어떻게 충당할 거냐는 질문에 대뜸 집부터 사라니. 그가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대투자의 시대가 도래함과 함께 너도 나도 'N잡러'로 거듭나고 있다. 그런 통에 나는 소위 말하는 '파이프라인'을 늘리기는커녕 주요 수입원을 싹둑 잘라버린 꼴이다. 보란듯이 시대에 역행하는 짓거리를 해놓고는 마통 잔액이 여유있다고 속편하게 있을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결코 그런 성격이 되지 못했다. 어찌됐든간에 믿을 구석이 있어야 한다.
- 믿을 구석이 있어야 해. 빚을 지더라도 그런 게 있으면 버틸 수 있거든.
- 믿을 구석이라니? 그게 뭔데?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 물려받은 재산?
- 장난 치지 말고.
- 나에겐 보유한 주택과 주식 같은 자산이 바로 '믿을 구석'이야. 당장 뜯어먹을 순 없어도 투자해둔 자산가치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거든.
- 내 말은 거기서 당장 쓸 돈이 나오냐는 거지.
그는 김이 빠진 듯이 말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당장 그 자산들을 처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걸 뜯어먹고 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통으로 버티는 와중에도 그걸 보면 심적으로 안정되는 면이 분명히 있다. 정말 유사시엔 처분을 해도 되고 말이다.
05.
그는 아직 전세에 살고 있으며, 자기 소유의 집을 장만하지 않았다. 나와 입사 동기이니까 경력도 동일하고, 수입 또한 비슷할 것이다. 우리의 출발 조건은 거의 같았다는 뜻이다. 나보다 아이 한 명과 강아지 한 마리를 더 부양해야되는 점은 다른 부분이지만. 그러나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실거주 집 1채를 장만한 나와 그의 자산 격차는 상당한 것이었다.
그가 집을 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출렁이는 집값에 대한 불안, 대출을 낸다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집을 살지 말지에 대한 선택은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오는 중대한 판단이므로 나는 누구에게도 그걸 추천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가 나에게 '휴직을 내게 된 원동력'을 물어왔기에 솔직히 대답해준 것 뿐이다.
- 실거주 하는 1주택. 재테크를 떠나서 심적 안정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지나고 보니까 금전적으로도 분명히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야. 따지고 보면 지금 나는 그걸 믿고 휴직을 나가는 것이기도 하고.
- 아직 모르겠다. 나는 네 말을 이해한다고 해도 와이프는 나보다 더 보수적인 사람이라서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거 같다.
- 응, 이해해. 그걸 알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말하는 거야.
사람들은 현재 유일한 수입원인 나의 노동력이 멈춘다고 해서 현금흐름이 완전히 끊긴다고 믿는다. 실상 그것은 정확한 사실이다. 나는 별도로 하는 사업도 없고, 휴직 기간 중에 알바를 뛸 계획도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반토막 난 시한부 월급에 더해 마이너스 통장 하나에 의지해서 수개월을 버텨야 한다.
희망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희망은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오래 전에 투자해서 보유하고 있는 자산들이 그 대상이다.
까짓 것,
정 안되면 평수를 줄이거나
팔아버리지, 뭐.
혈혈단신의 맨몸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이 나처럼 소심한 월급쟁이가 배짱부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