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하셨어요?
내일 출장 마치고
동대구역에서 내려볼까?
며칠 전 친구로부터 뜬금없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서울 출장을 마친 뒤 부산으로 가는 길에 저녁식사라도 함께 하자는 뜻이었죠.
요즘은 뭐든 예약을 해야 하고, 예약을 하려면 오픈런을 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때론 급작스럽게 치러야 하는 일도 있더군요. 이를테면 친구 만나는 일 같은 것 말이죠.
일상에 쫓기다 보면 미리 약속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그러자.
총체적 난국
이런 얘기 하려고
보자고 한 건 아닌데.
친구는 그 말을 시작으로 설움 가득한 결혼 생활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들어보니 친구 부부는 서로가 조금씩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더군요.
안타깝게도 부모님들 또한 그들의 삶에 침범해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고요.
적당히 맞장구도 쳐주다가 달래기도 했는데 통 엄두가 나지 않는 기분이었어요.
고양이
내가 뭐 하는 게 없잖아.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의 신세한탄이 계속되는 와중에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었습니다.
- 고양이들은 잘 크고?
- 한 마리 더 입양했지.
- 하는 거 있네. 고양이 키우잖아.
- 그건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잖아.
흠.
제주
- 올해 미국 여행 가볼까 했는데 전쟁 나더라? 일본이라도 가야 하나 싶어.
그랬더니 친구는 저지르고 보는 걸 추천합니다.
- 비행기표 발권부터 해. 다음 달부터 유류할증료 오르잖아. 나도 비행기표만 있다.
- 어디 가는데?
- 제주도. 6월에.
- 아직도 화해 안 했다더니 할 거 다 하네? 표도 예매하고.
- 내가 했나? 지가 했지.
흠.
갤럭시 S26 울트라
식사를 마칠 무렵 테이블 위에 놓인 친구의 휴대폰이 보였습니다.
- 이젠 아이폰 안 쓰나 봐?
- 이번에 바꿨지. 갤럭시 너무 편하다.
- 이번에? 그럼 S26?
- 어, 울트라.
안 하는 거 없네. 다 하네.
나 이러려고 만나?
'내가 하는 게 뭐가 있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그 말이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아들, 딸 둘에 고양이도 키우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최신형 휴대폰에 제주도행 비행기표까지 가진 녀석이 할 말인가?
'세계의 평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피부로 체감하게 되는 기 막힌 요즘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 각자의 평화 또한 그만큼 소중히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런 얘길 하려던 건 아닌데.'
친구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이런 얘기나 하려고 만나는 거죠.
시답잖은 얘기들, 그게 우리들이 평화를 누리는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from surt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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