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암을 진단받다.
“많이 아프셨겠는데 왜 이제 오셨어요? 지금 여기 보세요. 이 부분이 암.......흠.......근데 나이가 젊으셔서,
CT상 게실염인데 이게 50대면 S결장 부분은 대장암이라 하겠는데 젊으셔서. 일단 소견서 써드릴 테니 입원 치료 하러 빨리 큰 병원으로 들어가세요.”
나도 안다. 나는 젊다. 이제 막 마흔을 넘어선 82년생. 암 진단을 받기에 너무 젊은 나이라는 걸 나도 안다. 여러 말을 들었지만 딱 하나 위안이 될만한 말을 건졌다. 50대가 아니라 다행스럽다는 뉘앙스인데, 40대인 내가 퍽 다행스러운 순간이었다. 벌써 마흔씩이나 먹은 내 나이가 부담스러웠는데, 갑자기 조금 가볍게 느껴진다. 어찌 됐건 정신이 혼미해졌다. 사르르 아팠으면서 갑자기 많이 많이 아픈 것처럼 통증이 올라온다.
이게 모두 의사의 진단 탓이다.
주말이 되면 아프지 않아 나들이를 갔고, 어제는 집에서 수제 김부각을 와사삭 해 먹으며 즐거웠는데?
출근한 남편에게 전화 거니 “에이 무슨 암이야 아닐 거야 일단 병원 빨리 가봐. “
이 남자의 무심함! 예민한 나를 한 꺼풀 덮어 주는 마력이 있다.
여름 방학을 맞이한 두 아이들이 집에 있어서 점심거리를 사들고 마트 장을 대강 봐야겠다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책임감 강한 주부 신세. 회사 대표에게 전화 걸어 며칠 근무를 갑자기 못하게 되었다며 양해를 구하고, 이렇게 절차가 많아서야 당장 병원으로 갈 수 없는 처지가 처량했다.
바쁘게 집에 와서 짐을 싸는데 느낌이 무서웠다.
‘집에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막연함 불안감이 생겼고 소름이 끼쳤다. 왜 이런 생각 들지라며. 기분이 싸했다. 평소에도 촉이 보통 아닌 나는 자꾸만 내가 무서웠지만 애써 떨치며, 아이들을 단속해 놓고 혼자 병원 응급실로 들어갔다.
대장 속 염증수치가 높아서 조직검사를 바로 할 수 없다며 항생제를 맞고 내시경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로 하였다. 일단 피검사상 암표지자 수치가 정상으로 나와서 ‘그럼 아니지’라며 마음 푹 놓았다. 병원은 아직 코로나 19로 인해 면회가 자유롭지 않았고, 그 덕에 조리원 시절을 떠올리며 자유를 느꼈다. 입원 4일 차 되는 날 드디어 대장내시경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나, 대장내시경은 비수면으로 진행되었다. 덕분에 나는 내 대장 속을 볼 수 있었다 비명과 함께.
“환자분 이러시며 안 돼요 아프신 거 맞는데 소리 너무 지르시면 저희가 차분히 볼 수가 없어요.”
'저분 뭐야 비수면 해보고 저래?'
내 얘기 들었나 갑자기 친절히 S결장에 진입했다며 환자분이 보고 계시니 정확도를 위해 원래보다 조직검사 두 번 더 뗀다고 하셨다. 또 순간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다시 비명이 나왔다.
“너도 알지? 내가 위 내시경 무조건 쌩으로 하는 거. 너 절대 대장내시경은 비수면 하면 안 돼! 애 낳는 거보다 훨씬 아파! “ 끝내고 나니 비수면 대장 내시경을 해냈다는 사실이 뿌듯했고 대단한 걸 해 낸 기분이었다.
친구에게 절대 비수면은 하면 안 된다고 그건 대단한 경험이었노라 이야기하였다.
이제 홀가분하다. 내일은 퇴원이고, 결과는 외래에 와서 보기로 하였다. 이 자유로움도 끝이구나 내심 아쉽기도 하면서도 집이 너무 그리웠다.
강아지 같은 우리 아이들, 떨어져 있으니 너무 보고 싶어진 남편을 떠올리며 그렇게 잠이 들었는데.
이것은 꿈일까?!
의사는 사복을 입은 채로 퇴근을 하다가 다시 왔다며, 숨을 고르더니 나지막이 나에게 말했다.
“조직검사 결과 암이 맞습니다. 수술은 다음 주 수요일에 일정 잡을 테고 나이가 젊으셔서 항암치료 하시는 게...”
그 뒷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네?? “
눈물도 나지가 않았다. 그대로 모든 장면이 멈췄다. 질문이 있냐는데 머릿속이 새하얬다. 애써 한마디 생각해 냈다.
“그럼 저는 몇 기예요?”
들은풍월로 암이 기수가 있다던데...
그건 수술로 조직을 떼어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난생처음 알았다.
나는 얼굴색이 좋았다. 건강하고, 긍정적이다. 그리고 가족력이 없다. 그런데 왜...
의사가 돌아가고 난 뒤, 이제야 혼자 커튼 쳐진 병실에서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 냈다. 이만하면 착하게 산거 같은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 못 된 걸까. 내가 한없이 가여워서 슬펐고 이제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구나.
‘하나님...’ 그 뒤의 기도가 이어지지 않았다. 살려달라는 말도 차마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남겨 두고 가야 하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난 한동안 이들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