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함
인간이 태어나 앎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교육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인류 초창기의 교육에 비해 현재는 다양하고 전문적이며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교육이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수단’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생존과 종족 보존을 최우선으로 교육함이 이루어졌고, 문자가 발명되면서부터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비약적인 발전이 거듭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가 점차 세분되면서 사회의 구조적 특징에 따라 그 시대에 절실한 과제를 해결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나는 「敎育함」을 목적으로 선생님에 부임하여 늘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 학생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고민을 떼어 내 본 적이 없다. 「스승」이란 호칭을 가슴에 새기며 고민하고 아파하면서 ‘가르치는 자’의 고뇌를 매일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스승으로서 바른길로 제자를 안내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경우가 많다. 왜 이렇게 교육이 어려울까? 시대적 구조에 따라 선생님은 ‘어떻게 무엇을 가르치고’ 학생들은 ‘무엇을 배워야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를 하나로 정의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교사 생활을 통해 얻은 작은 경험이 다른 선생님들께 보탬이 되길 소망한다. 이를 통해 교육 현장에서 단 한 명의 학생이라도 행복을 느끼고 참다운 스승을 만났다고 자부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수 없는 보람이 될 것이다.
우선 교육 내용의 역사적 배경 이야기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추정하건대 사냥, 채집, 어로(漁撈), 병충해로부터의 방어, 독성식물의 접근 금지를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 금기시하는 것을 교육의 주목적이 되었으리라. 수렵 채집에서 농업으로 정착하면서 집단을 이루고 서로 소통하려는 과정에서 언어와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교육은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고대사회의 문헌을 보면 주로 복점(卜占), 농법, 병법, 약방문, 천문으로 부족 국가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점차 부족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정치가 필요한 시점부터 지도자의 지도력과 통합의 인격이 요구되면서 교육의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 교육으로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의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출현과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교육이라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계기로 학문의 다양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부터는 인간의 인격교육보다는 학습의 결과물이 도출되는 지식교육이 중요시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반성적 사고의 지혜’를 바탕으로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교육보다는 실용성을 바탕으로 학문의 융합을 주제로 국가를 뛰어넘는 교육이 인간교육을 압도하고 있다. 미래에는 어떤 교육이 펼쳐질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 것 같다. 그건 그 시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변천에 대한 편감(片感)이다. 고대는 부모가 곧 스승이었을 것이다. 자기 집안의 비법이 전수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라면 근대 봉건사회에서는 지식이 풍부하고 인격을 갖추어진 사람을 역할 모형(role model)으로 평생의 사부님으로 모셨다. 이 시기에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가 같다.’라는 뜻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래서 스승의 그림자도 밝지 않는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교육함의 목적이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한 인간의 합목적적 존재 방식으로써 사람됨의 실천을 겨냥하는 교육이었다. 그래서 스승님의 이름을 욕되지 않으려고 행동을 절제하고 언행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 생각할 때 수많은 선현 중에 대표적 스승이라면 퇴계 이황을 꼽을 수 있다. 제자들의 회고에 의하면 한 번도 자세를 흐트러지지 않고 잠을 자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고 할 말 큼 ‘경(敬)’의 자세를 실천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했던 참 스승의 본보기이다.
현대의 패러다임(paradigm)은 민주사회, 과학, 기술, 세계화, 상업 사회이다. 현실적인 실용 학문을 통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지금의 중, 고등학교 선생님은 모든 학문의 근거인 순수 인문학의 현실을 외면한 채 단편적 지식 전달 교육과 입시교육에 모든 정열을 쏟아붓고 있는 모양이다. 이는 결국 인간의 불평등 의식 심화에 큰 공헌을 하는 셈이다. 여기서 지식을 사고파는 선생님은 생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직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취급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밥벌이는 일종의 장사다. 그렇다면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 교직도 어쩔 수 없이 장사다. 그래서 세상은 사도(師道)의 전락을 탄식한다. 제자가 스승을 농락하고 고발하고 폭행하며 살상까지 한다고 분노하고 경악한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스승만은 청렴하고 순수하며 오직 교육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목에 힘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학생과 사회인들은 선생님을 상업 사회의 일원 이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아무도 선생님을 상업 사회의 일원 이상으로 대우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선생님만은 상업 사회의 일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병적인 사회의 일면을 보여 준다. 지식을 파는 학교 선생님은 입시의 지식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학원의 강사에게 선생님 자리를 내준 지 오래되었다. 국가에서도 대학 입시정책 변화를 통해 공교육 정상화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상업 사회의 패러다임 아래에서는 극복이 어려울 것 같다.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의 문제는 그 사회의 문제이다. 현대 사회는 시민사회, 기술 산업사회, 국제사회, 상업 사회, 정보사회다. 이러한 사회에 통용되는 지성은 기술적, 도구적 지성이며 영리적 지성이다. 영리적 지성은 도덕적 지성이 아니다. 영리적 지성에 대립이 생기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폭력을 근원적으로 삼고 있는 상업윤리의 도덕성을 간과한 현대 사회의 스승과 학생의 도덕성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선생님과 학생 간의 도덕적 지성을 버리고 교육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현대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도덕률이 필요하다. 아무리 사회가 변화해도 인간 본연의 자세를 바탕으로 그 사회에 걸맞은 도덕성 교육이 절실하다. 현재 학생에게 영리적 지성을 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삶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지성을 바탕으로 영리적 지성을 활성화하는 교육이 미래 교육의 중요한 지표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에 따른 실천 방법론을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생님의 자세를 논어(論語)에서 찾고 인간 행위의 궁극 목적을 대승불교에서 제시하는 덕목에서 찾은 경험을 간추려 제시하려고 한다.
현대 학생의 특징이 영민(英敏)하지만 외로운 것이 특징이다. 누구 하고도 속 시원하게 자기의 자랑이나 고민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 가정이고 학교이고 친구의 인간관계다. 그래서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 주는 전자기기나 스마트 폰에 집착한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사회가 단순하여 많은 사람과 대화가 필요했기에 자기의 참된 내면적 지성만 유지하면 주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지고 인간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 매체의 발달로 세계의 뛰어난 천재들의 결과물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면서 본인의 능력은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의 능력이나 소유물을 과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 바보가 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적과 능력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남들보다 한 발 앞서가고 1등을 해야 능력을 보상받기 때문에 자기 홍보에 치중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인정도 해 주지 않는다. 현재 학생이 도덕적 지성보다는 영리적 지성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야 올바른 스승의 길을 갈 수 있다. 일상적 선생님의 본분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30년 전만 해도 왕성한 지식과 이벤트를 통해 학생에게 감동을 주어야 훌륭한 선생님이라는 인식은 수많은 일화를 통해 알려져 있다. 현재의 훌륭한 선생님의 길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학생에게 편하게 접근하여 학생의 고민이나 생활상의 문제점을 차분히 들어주는 것이다. 학생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주면 학생의 말속에서 문제점이 도출되고 해답은 자동으로 나온다. 학생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면 ‘협동’, ‘겸손’, ‘인내’, ‘배려’, ‘도덕의 필요성’을 스스로 해결한다. 아주 완벽히 잘한다. 선생님이 훌륭해야 제자도 훌륭하다는 등식은 영리적 지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도덕적 지성이 바탕이 되는 참된 선생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지금 교육 현장의 모습이다. 선생님을 알아주지 않아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않고 묵묵히 학생의 말을 들어주는 쪽이 진정한 스승의 바탕임을 되새겨 보는 슬기로움이 필요하다. 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篇) 셋째 구절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의 참뜻을 되새겨 보는 선생님이 필요하다.
현재 학생의 특징 중에 또 하나가 개인주의 또는 이기주의다. 옛날에는 ‘콩 한 개라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속담에서 보듯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현재의 학생들은 콩 하나에 10명이면 10등분, 20명이면 20 등분하여 자기 몫을 찾는 것이 현실이다. 분배 법칙 측면에서 보면 매우 합리적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현대 사회는 상업 사회가 아니던가. 최소의 투자에 최고의 이익 창출과 최소의 노동에 최고의 능률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이런 원칙을 배우고 몸소 실천하는 학생에게 공동체 이익을 위해 기꺼이 내 몫을 남에게 주라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남을 위해 무상(無償)의 봉사를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일 중에 최고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실제 교육 현장에서 가장 힘든 것이기도 하다. 이런 모형을 지도하고 해결하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남을 도와 내가 이익이나 보람을 느끼도록 지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정착된다는 보장이 힘이 든다,
2학년 담임할 때 있었던 일을 돌이켜본다. 학년 초인 3월에 학생을 유심히 관찰하는 중 매우 초라하고 머리를 감지 않은 모습의 학생을 상담하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 학생은 집이 교문 바로 앞인데 매일 아침 지각을 한다. 게다가 수업 시간에 잠을 많이 자며 주변 학생이 냄새가 난다고 주변에 앉기를 꺼렸다. 그래서 일주일이 지난 뒤 우리 반 학생에게 친구를 배제하지 말자고 간단히 부탁하고 이 학생과 같이 목욕 갈 사람을 우선 모집했다. 보상은 자율학습 하루 면제해 주는 것이다. 서로 가려고 아우성을 친다. 그 외에 학생 집 청소하러 가기, 반찬 갖다 주기, 비슷한 덩치는 속옷과 겉옷 선물하기, 수학여행 갈 때 모금하기 등이다. 처음에는 소문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몇몇 학생과 협의하여 진행했고 나중에는 학급 자치회에서 스스로 도움받는 학생이 모르게 실천했다. 그해 종업식 날 담임이 고기 뷔페에서 통 크게 한턱낸 적이 있다. 너무 사랑스러운 학생이다. 이 학생들이 3학년이 되어 대학 입시에 자기소개서 작성에 ‘남을 배려하거나 봉사한 일’에 자신의 체험을 자신 있게 적고는 남을 돕는 일이 보람 있다고 느낀 걸 경험했다. 혜택을 받은 학생도 매우 활발하게 일상적 생활을 했고 다른 학생과 잘 어울리고 매우 좋아졌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풂을 뜻하는 무주 상보 시(無住相布施)의 참뜻을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해야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역사를 통해 순수 인문학적 학문인 도덕적 지성을 「교육함」에서 도외시하고 기술교육으로 대표되는 영리적 지성에 치우치는 교육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해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간사회이다. 인간이 사는 사회이기에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가 필요하고 그 기본 도리를 교육함이 바로 진정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 중에 최고의 가치를 ‘된 사람’으로 교육 목표를 세워 진정한 스승이 되어 봉건사회의 군사부일체가 아니고 상업 사회의 밥벌이 장사가 아닌 현대 사회의 존경받는 스승이 되어 진정한 교육함을 실천하려는 결기가 그리운 지금이다.
찰리 채플린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인생을 가까이서 보면 비극(悲劇)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喜劇)이다.” 이를 적당히 각색하여 빌리련다. 선생님은 멀리서 보면 일찍 퇴근하고, 방학이 있고, 연금이 있는 꽃길을 걷는 직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의 모습은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오직 오매일념(寤寐一念)으로 학생의 행복을 빌고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기원하지 않던가. 선생님 아자!!!
2018.1.30. 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