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보람
선생님을 시작한 지 만 30년이 지났다.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겨울 정도로 오래 했다는 생각도 없다. 아직은 약간의 두려움이 있지만, 학생과의 관계가 매우 좋기에 날마다 출근이 기쁘기 그지없다. 보통, 이 나이에 교장을 하지 못하면 열등감이 있거나 학생과의 소통이 어려워 명예퇴직을 꿈꿀 수 있는 나이다. 주변 동료를 보면 퇴직하여 별 뚜렷한 목표나 장래 계획이 없는데도 명예퇴직을 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학생과의 관계에서 소통이 어렵다던가, 학생이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거나, 내가 판단하여 학생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되면 그 시점이 퇴직한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교직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2019년 3학년 생활과 윤리 수업을 주당 3시간씩 하는 반이 4개 반이다. 3월 첫 주가 되면 올해 학생들 수준이나 수업 태도, 지적 능력을 파악하여 수업 준비를 한다. 3월 둘째 주가 지나면서 내가 자꾸 교실에 가고 싶다. 표정이 밝은 학생들이 자주 눈앞을 스쳐 간다. 2개월이 지나 5월이 오자 이제 학생들과 소통도 쉽게 하고 나이를 잊은 채 농담도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쉽게 한다. 5월 14일 포항에 문상(問喪)하러 가기 위해 정장을 하고 왔다. 내가 키가 좀 큰 편이라 양복 정장이 좀 어울리는 편이다. 피부가 뽀얀 여학생이 “어~~ 선생님 오늘 어디 가시나요?”라고 묻는다. “오늘 선생님이 아주 멋진 사람과 바람을 좀 피워볼까 하고 양복 입었다” 하자 여학생 두 명이 “선생님 나빠요. 이제 선생님 수업 거부할 거예요?” 협박한다. 그리고는 내 배를 툭 치고 “미워요” 하면 쪼르르 간다. 다음 시간이 이 반에 수업 시간을 알기에 농담한 것이다. 수업하러 가니 두 여학생이 뒤쪽에 서서 나를 노려본다. 내가 가볍게 미소를 보내며 “선생님이 오늘 포항에 조문(弔問)이 있어서 예(禮)를 갖추려고 양복을 입고 왔다. 좀 괜찮나?” 하니 몇 명이 큰소리로 “네” 한다. 뒤쪽에 농성하던 두 여학생도 웃으면 자리에 와서 “그러면 그렇지! 이제 윤리 수업 더 열심히 들을게요.” 한다. 이것 말고도 자기들이 애정 표현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하고 나 역시 학생들의 인성적 측면이나, 행위적 측면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실제로 교직 30년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처음 교직할 때 상황이 몹시 어려웠는데 22년이 지난 시점부터 학생들의 태도가 점차로 좋아지면서 올해가 정점을 찍을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내년도에는 더 좋은 분위기를 기대해 본다.
2019년 5월 15일이다. 어제 포항에 친구 모친상에 조문하고 새벽 1시 30분에 도착하여 약간의 피곤함을 느끼며 출근하였는데 내 책상 위에 카네이션 생화 화분이 놓여있고 쇼핑백도 놓여있다. 누굴까? 편지를 보니 제자이다.
「To 홍윤헌 선생님
사랑하는 선생님, 제자 ㅁ상입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이렇게나마 전해 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을 만난 것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터가 되어
공부도 못하고 말썽꾸러기 학생에서 열심히! 성실히! 하려고 하는 학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만남이 어떤 선생님과 만남보다 더 귀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합니다.♡」
대학 가서 4년간 줄 곳 1등을 하고 지금은 교생 실습하는 제자이다. 아침부터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1교시 수업 가서 열강하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 휴대전화가 몸부림을 친다. 제자에게 온 문자이다. 청소년기를 참 어렵고 힘들게 보내다가 졸업 후에 대학에 진학하고 어학연수 갔다가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아들 낳고 사업하는 신랑과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며 재미있게 사는 부부이다.
「보고 싶은 나의 선생님♡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는가요.~~
항상 뵈러 가야지 하면서도…….
죄송하고 감사해요. ㅠㅠ
제가 지금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건 선생님 덕분이에요.
항상 제 편이었고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ㅎㅎ
멋진 우리 선생님♡
저보다는 안 이쁜 꽃이지만, ㅋㅋㅋㅋ 예쁜 꽃 보고
오늘 조금 더 행복한 날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존경합니다.♡」
수업 마치고 교무실에 오니 함빡 웃는 꽃다발과 선물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커피 40잔이 내 이름으로 배달되어 젊은 선생님에게 많은 인사를 받았다.
내가 한 일은 조금인데 이렇게 환대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카톡으로 문자가 왔다.
「찾아뵙지 못하고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가르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오늘 수업 언제 끝나십니까?
제가 식사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이 졸업생은 이제 26살인데 취직하여 직장인이고 첫 월급 타서 선생님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늦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했던 학생이다. 그날 저녁 3명이 모여 저녁 먹고 당구치고 치킨 맥주 한잔 하며 스승의 날을 만끽했다. 술집에서 두 졸업생이 얼마나 깍듯하게 선생님을 대했던지 술집 주인이 어느 학교 근무하느냐고 물어 온다.
여러 문자 중에 뜻깊은 문자 하나가 더 있다. 담임한 적이 없는 여학생으로 다른 학교에서 학교 부적응으로 고생하다가 우리 학교로 전학해 온 학생으로 유아교육과에 진학한 학생이다. 힘들어 보일 때마다 이야기를 한 학생인데 지금은 마산에서 최고 큰 병원의 공설 유치원에 공채로 합격하여 선생님을 하는 졸업생이다. 여러 말 중에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는다. “스승의 날이나 내가 힘들 때면 생각나는 선생님인데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과 여유로움은 유치원이지만 늘 유치원생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기특한 제자다. 예쁜 여자는 3년이 행복하고 똑똑한 여자는 30년이 평안하고 지혜로운 여자는 3대(三代)가 행복하다 했던가? 갑자기 지혜로운 선생님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교사 처음 할 때 30년 후에 내가 가르친 내용이 제자들의 삶의 일부분으로 흡수되어 갈 수 있다면 성공한 교사이고 교사의 보람을 느낀다고 목표를 세운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목표는 변함이 없다. 작년까지만 해도 40대 중반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감사하다고 했는데 이제 20대가 감사하다고 한다. 내가 초창기는 좀 미숙하다가 교직 25년쯤 완숙한 교사가 되었나? 싶다. 내 비록 작은 배려와 사랑이 제자들의 삶에 터닝 포인터가 되었다니, 그리고 나의 교육관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제자가 1명이라도 있으면 보람된 선생님인데 다수가 말을 해주니 참 기분이 좋다. 한 일주일 뒤에 40대 중반의 여자 제자가 커피를 가지고 학교에 왔다. 올겨울에 교육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한다. 강의 다니고 소외된 학생들 상담 일을 주로 한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늘 약자 편에서 보호하고 소외된 학생에게 신경을 많이 쓰시던 선생님이 생각이 많이 난다며 자기도 소외된 학생 상담을 제1로 하고 부부 교육, 부모와 자식 간 교육, 성교육, 일반인 이야기 들어주기로 진로를 정했단다. 아주 좋은 일 한다고 칭찬해 주며 대화하는데 나의 제자가 아니라 거의 동등한 수준이거나 어떤 분야는 내보다 한 수 위이다.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다. 감기 기운이 몸속 깊이 침투하여도 마음이 기쁘니 몸 아픈 것도 잊어버린다. 한 시간 정도 이야기하다가 집에 가면서 “선생님 술 좋아하시는데 저도 잘 마셔요” 한다. “담에는 맛있는 술을 대접할게요” 하면서 미소 천사의 자태를 뽐내며 간다. 누구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던 이순신 장군의 당부가 없었다면 학교 마이크를 잡고 마음껏 큰소리치고 싶다.
세월은 흐르고 인간은 망각 증세 때문에 대부분을 잊는다. 소중한 사람을 적어 보라면 많은 사람이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선생님 이름도 1~2명 정도는 적을 것 같다. 그래도 선생님을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하거나, 감사의 표현을 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들의 삶에 절실하거나 큰 이익을 주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나는 행운아임이 틀림없다. 진실을 다 했기에 찾아오는 보람일 수도 있을 거다. 남은 교직 기간 최선을 다해 보자. 지금보다 더 감동한 제자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을 중얼거리며 혼자 웃는다.
2019. 5. 23 憲